또 경단녀가 되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경단녀라는 말을 모르는 분은 이제 없을 것 같습니다.
경력단절 여성의 줄임말로 사전적 의미는 15~54세 기혼 여성 중 결혼, 임신 및 출산, 육아, 자녀 교육, 가족 돌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여성을 말합니다.
"임신입니다" 하는 순간에 토를 쏟아내는 엄청난 입덧 탓에 일을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던 저로서는 둘째 임신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난제였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 이전에 입덧의 역경을 어떻게 뚫고 지나갈지가 너무 염려됐습니다. 그분에게서 벗어나겠다. 더 이상 나를 우습게 생각하는 그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리라. 내가 할 일이 뭐 없겠냐 하고 호기롭게 사표를 쓰고 나왔는데 이직 대신 입덧이 기다리고 있다니요.
그래도 시곗바늘은 흘러가고, 아이도 낳게 됩니다. 한번 해 봤으니 둘째 키우는 건 더 쉽지?라고 얘기하는 사람 입에다 양말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아이마다 기질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내 뱃속으로 낳았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게다가 내 체력은 5년 전보다 더 떨어져 있고, 정신력은 내 몸뚱이 하나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애만 보고 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몰라. 일을 하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애 낳았다. 응응. 잘 지내지? 그래. 혹시 요즘에 어디 자리 없니?
평소 같으면 일자리 알아봐 달라는 전화는 엄두에도 못 냈을 텐데 이보다 더 급할 건 없다 싶었는지, 그런 말들이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면접을 잡게 됐습니다. 둘째 생후 50일이 됐을 때 일입니다.
'그래, 육아 탈출이다. 다시 화려했던 나의 옛 시절로 돌아가자. 생각보다 복귀가 빨라. 훌륭해.
더 열심히 일하겠어. 뭐든 할 거야. 나는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면접은 아주 좋았습니다.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고, 업무에 관한 제 답변에 대해 굉장히 만족하셨습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죠. 그렇죠.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네요. 피드백이 굉장히 좋으시네요."를 연발하셨으니까 말이죠.
향후 복귀 일정까지 논의했습니다. 이때까지 준비해서 이때쯤에 투입하는 것으로 하자.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근데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정말 캐주얼한 질문입니다.
이미 당락은 결정되어 있었고, 일을 같이 하기로 했고, 복귀 일정까지 맞춰졌습니다.
긴장이 풀려서였던걸까요. 아니면 내가 너무 낙관적이었던 탓일까요.
"네. 아이가 둘이 있고요. 둘째가 오늘 딱 50일 됐습니다"
아.........
그 순간에 스치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의 변화. 어두워지는 면접관들의 표정.
그 순간 제 마음이 얼마나 슬펐는지요.
"아.. 그럼 아이는 누가 보나요?"
허를 찔렸습니다. 소는 누가 키우니? 도 아니고, 살다 살다 아이는 누가 키우니?라는 질문을 제가 받을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일을 하게 되면 애는 내가 알아서 하겠지. 그걸 왜 회사에서 신경 쓰나? 회사에서 관여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내 개인적 문제 아닌가?
그런데 회사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다 좋은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되겠네요. 미안합니다. "
연신 웃어주면서 긍정적으로 피드백해 주시던 남자분이 말씀해주십니다.
"저도 쌍둥이 키우지만 어릴 때는 갑자기 아픈 경우도 많고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이 너무 많더라고요. 죄송하지만 아이 좀 더 크면 그때 같이 하시는 게 어떨까요?" 주로 가만히 듣고만 계셨던 여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가만히 자리에 서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무릎을 세게 탁 치는 느낌입니다.
그 충격에 저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맙니다. 그런 느낌이, 그런 충격이 순간 제 온몸을 휘감아 오릅니다.
에둘러 거절입니다.
빙빙 돌아 거절입니다.
나에게는 그 나중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혹여 나중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일하고 싶은데..
그런데 상심이 크지는 않습니다.
"맞아. 애가 둘이나 되는데 무슨 벌써 일을 한다고 이러냐. 붓기도 안 빠졌는데.
사실 면접 붙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나가기는 했지만 한 달 월급 180에 올려놓은 시터넷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습니다. 아이 한명일 때는 월 140이면 조선족 이모님을 쓸 수 있었는데.. 프리로 하는 거라 수입이 들쭉날쭉할 수 있어서 월 180으로 올려놓았지만 아이 둘에 180은 택도 없답니다.
특히 신생아가 있는 경우에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시터들이 꺼려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나라도 밤새 잠도 못 자고 고생하는 그런 집에는 웃돈을 줘도 안 갈 것 같은데 그분들이라고 뭐 다를까요.
그전에 거래했던 소개소에 전화해보니 애가 둘이면 최소한 월 200 이상이어야 조선족 이모님을 모실 수 있답니다. 200도 신생아의 경우는 힘들 수 있다네요.
면접 때문에 시골에서 올라온 친정엄마에게 '불합격'의 비보를 전달했습니다.
"나 떨어졌다. 애가 너무 어리대. 잘 됐지 뭐"
맘에도 없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면접을 떨어졌다는 창피함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잘됐다. 잘됐다. 애도 이렇게 어린데, 어딜 나가서 일한다고 그러니.
잘됐다. 잘됐어. 애 다 키우고 그때 일해도 돼. 50일밖에 안됐는데 너 일 나간다고 해서 일단 오기는 했는데, 잘 됐다. 면접관 그 사람들이 내 소리를 들었는가 보다, 야"
'애가 둘이나 되는데. 50일밖에 안된다는 애를 두고 일하러 나간다니 나는 정말 대책이 없는 엄마야.
됐어. 좋은 경험이었어. 어차피 시터가 구해질 것도 아니고. 집에서 애나 보자.
나는 괜찮아. 애 둘 키우는 것도 대단한 일이잖아?'
그렇게 또 1년. 또 1년이 흘렀습니다.
"언제 복귀해? 일 안 해?"라고 묻는 전화 속 업계 동료들에게는
"응. 인제 은퇴해야지. 아줌마가 뭔 방송이니. 은퇴했어 나는"이라고 애써 에둘러 말하곤 했습니다.
나의 취업 의지는 그렇게 하루하루 꺾여만 갔습니다.
애 둘을 키우면서 내 한 몸 숨 쉬며 사는 것도 지쳐가던 시기였으니까요.
어느 날, 아이들과 마트를 가던 중간, 좌회전을 돌던 그때 내 눈에 현수막이 눈에 들어옵니다.
"성인권 강사 양성과정 모집"
그래. 저거다.
나의 미래는 저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