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변명 '내가 너 좋아하잖아'
쫑파티 날이 되었습니다.
집에 데려다 주겠답니다.
쫑파티는 무리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평소 같이 방송하던 피디님, 관계자 분들 몇분이 모여서 소소하게 샤브샤브를 먹었습니다.
방송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밖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이라 아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이다와 콜라를 섞어 마시며 "그동안 고생했다" "인제 뭐할거냐" 등의, 내일부터 실업자 인 사람을 향한 의미없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실업자는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다들 시간 맞추기 바쁜 사람들이니까 마지막 방송 며칠 전에 쫑파티 자리를 만든거였습니다.
예비 실업자도 실업자는 매 한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상심하지 않았었죠.
'방송 경력자니까 얼마든지 다른 자리 구하면 되지, 뭐 안될 거 있어? '
제가 또 자신감 하나 만큼은 쩔어요..
그런 저를 그분은 참 여지없이 흔들어 놓습니다.
흔든다는 건 너무 점잖은 표현이예요. 깔아뭉게서 으깨놓습니다.
매쉬포테이토 같은거 있잖아요. 저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비 많이 오는데 조심해라." " 너는 다시 회사로 들어가냐?"
"어떻게 갈거야? 나도 좀 태워줘." " 비 너무 많이 온다"
그때 갑자기 그 분이 큰 소리로 저를 부릅니다.
"데려다 줄게. 내 차 타고 같이 가자"
주위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안가고 뭐해? 같은 동네 살고 있는거 다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같은 동네 살아요. 지금은 이사 가셨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동네 한 블럭 차이입니다.
그분이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현재도 마찬가지기는 해요.
길을 지날 때마다 어느 차에서 혹시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약간 의식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이 일에 대해 글을 쓰고 얘기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은 알거 아니예요.
자기가 했던 과거의 그 일에 대해서.
과연 아직도 한동네에서 같은 공기 마시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면 기분이 매우 안좋습니다.
그분이 내 뱉은 이산화탄소 섞인 공기가 제 코에 들어가지는 않았겠죠?
비도 억수로 오는데 그 호의를 거절하면 도리어 제가 이상해지는 순간입니다.
사람들과 인사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분이 제로백 8초라던가, 아무튼 속도도 잘나가고 디자인도 잘 빠진 차라고 자랑했던 푸조 자동차가 우리를 반깁니다.
집에만 가면 됩니다. 집에만 무사히 도착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그분이 새벽에 방송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혼자 간다던 망향 국수 집도 지나칩니다. 이대로 가면 집에 곧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분이 얘기 합니다.
"마지막인데, 커피나 한잔 하고 가자"
차를 어디로 모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근처 커피숍에 가겠죠.
커피숍은 사람도 많은데 무슨 상관입니까.
바이크를 몰고 자주 간다던 어느 한강변으로 갑니다. 가는데 그리 멀지는 않았습니다. 일하는 곳이 한강변 근처라면 나름 근처였거든요.
커피숍 간판이 보입니다. 비도 억수로 쏟아지는데 얼른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면 참 좋겠습니다.
커피숍을 지나칩니다. 저는 약간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는거죠?"
"바이크 타는 사람들만 아는 장소가 있어. 거기서 커피 마시면 완전 꿀맛이야"
조금 더 가서 어느 다리 밑 주차장에 들어섭니다.
저 멀리에 그분의 말대로 똑같은 자동차를 가진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습니다. 바이크 동호회 대신 오늘은 특정 자동차 동호회 분들이 모여 계셨나 봅니다.
그나저나 커피를 마시겠다는 사람이 왜 다리 밑에 온 걸까요?
다리 밑이라 비는 차에 가 닿지 않습니다.
그분이 내려서 근처에 있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커피 2개를 뽑아옵니다.
'쫌생이'
후배들에게도 뭐 사주는 일 없던 분이였는데 역시나 마지막으로 마시는 커피가 캔커피라니..
그럴 줄은 알았지만 진짜 그럴 줄은 몰랐네..
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이후에는 뭘 할거냐. 이렇게 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 등의 몇년 더 살아본 인생 선배의 조언 같은 거랄까요.
"이제 집에 가죠" 제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자"
캔커피 두개를 밖에다 버리고 출발하는 듯 하더니 얼마 못 가 차를 멈춰 세웁니다.
다리 밑은 벗어났기 때문에 장대비가 차창을 세게 때립니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조금 더 얘기하다 가자"
"아하하하.. 뭐 또 연락하고 그러면 되지. 전화하고 카톡하면 되죠 뭐"
"내가 사실은 너 좋아하잖아"
그 분이 제 손을 잡았습니다.
"아하하하하하하. 뭔 소리예요 그거는.. 장난 하시기는.."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색하게 웃는 것 뿐이었습니다.
저를 안으려 합니다. 저는 최대한 팔을 길게 뻗어 몸이 밀착되는 것을 막습니다.
그분의 숨결이 제 목덜미에 다가와 붙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가열차고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어야지,
그런 밍숭맹숭한 태도가 더 허용적으로 비춰졌을거 아니야!'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제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은 굉장히 적었습니다.
어딘지 모르는 장소에 밖에는 비가 억수로 내리고, 좁은 차 안에서 둘만 있습니다.
내가 강하게 저항한다면 평소 젠틀하기로 소문난 대 선배인 그분이 어떻게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젠틀한 사람이면 애저녁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겠죠.
어디서 배운 적 없지만, 그 순간에 제가 느낀 불안감과 공포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려서 도망갈까?'
'여기서 차 밖으로 나가면 난 집에 온전히 갈 수 있나?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왜 나는 우산도 없는거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이 분이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분을 일단 진정시키고
온전한 정신으로 이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남편과 내 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무사귀환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