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하는 고백 -5-

마지막 방송, 경단녀의 탄생

by 감주

최대한 그가 밀착해 오는 것을 막아보려 애씁니다.

그리고 많이 웃습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그 상황에서 어색하겠지만, 궁색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큰 소리로 웃어봅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진절머리 나게 계속 웃으면서 그분의 등을 두드립니다.

'이제 놔. 그만 놔. 뭐하는 짓이야, 나한테..'

분명 사람이면 알 수 있을 텐데. 내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이런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걸 모르나?


제 딴에는 격렬하게 저항한 겁니다.

"아하하하하하" 웃으며 그분의 등을 두드리고 몸을 최대한 멀찍이 두려고

점차 다가오는 그분을 팔에 힘을 주어 밀어내는 것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으나,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제 반응이 달가왔을 리는 없습니다.

고분고분 가만히 있거나,

'그래, 사실 나도 당신이 좋았어' 따위의 막장 드라마적 전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니까요.

제 풀에 손을 풀고 숨소리를 제 목덜미에 박아 넣으려던 시도를 멈춥니다.

약간 어색한 공기가 흐르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미 사회 체계에 능수능란하게 적응한 성인이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남편에게 전화가 옵니다.

"어디야?"

"어, 가고 있어. 거의 다 왔어. 금방 갈게"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큰 돌 하나가 제 가슴팍을 칩니다.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남편에게 너무 미안해집니다.

순간 제가 더러워진 여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원하지 않게 손을 잡히고 껴앉음을 당하고, 목을 내어줄 뻔했던 나도 이럴진대, 더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어, 잘 가. 다음 방송 때 보자"

데려다주셔서 감사는 쥐뿔. 대체 너 왜 그러니. 집에 갓난쟁이 애도 있는 놈이. 정신 안 차릴래? 하면서 목덜미를 부여잡고 싶지만, 저는 사회적 동물이니까요.

인사말에 항상 자동 완성되는 '감사합니다'란 말을 본심과 전혀 상관없이 내뱉을 줄 아는 저는 우등한 사회적 동물입니다. 신물 나게도.

결국 집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집에 도착했습니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습니다.


남편에게 죄를 지은 기분입니다.

집에 가자마자 샤워를 합니다.

부정한 여자가 된 기분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며칠 뒤 마지막 방송날이 다가왔습니다.

오후 3시 방송이었기 때문에 1시까지만 회사에 들어가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 사다 놓은 임신 테스트기를 꺼냅니다.

요사이 컨디션이 좋지 않았거든요. 첫째 때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약을 사 먹어야겠는데, 또 왠지 약을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일하다 말고 근처 산부인과에 가서 이렇게 외쳤던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 저 냉방병인가 봐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응, 너 같은 애들 많이 봤어' 하는 표정으로 임신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셨고 결론적으로는 '임신 6주, 노 진통제'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게 5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그런 예민한 감각들은 나도 모르는 어딘가에 살아있었나 봅니다.

'이렇게 안 좋은 내 몸 상태는 단순 과로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직감 때문일까요.

아무튼 임신 테스트기 결과는 두줄입니다. 생각지도 않던 '둘째'당첨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임신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주변에 떠들지 않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입덧만은 나만이 알고 있는 임신의 신호입니다.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있었기에 속으로 빌고 또 빌었습니다.

'방송만 잘 끝내자, 토하지 말자. 방송 중에 토하면 끝이다. 정신력으로 버텨라. 말 꼬이지 말자.'


세상에 아직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뱃속 둘째의 너그러움 때문인지 방송은 잘 마쳤습니다.

입덧의 울렁거림도 가실 만큼 생방송의 압박감과 긴장감은 비교할 데가 없기는 합니다만

방송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오른 손가락으로 왼손 바닥을 계속 꽉 누르고 꼬집으면서 이루어낸 정신력의 승리라고 자부합니다.


물론 방송 중에 그분은 저의 안색을 보시고 다정하게 걱정하는 말들을 남기시기도 했습니다.

"얼굴이 안 좋다. 어디 아프니?"

당신이 며칠 전에 나한테 한 짓은 정녕 생각이 안나 시는 겁니까?

스태프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 순간,

우리는 미소 안에 모든 것을 감추어 둘 수 있는 위선적인 동물이기도 했으니까요.


어쨌든 후련하게 마지막 방송도 마쳤고, 그분과 마주칠 일도 없습니다.

홈쇼핑이라는 게 방송사나 일자리가 제한적이라 향후 제 일자리 상태에 따라서 다시 그분과 작업을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제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단 오늘 주어진 방송은 잘 마쳤으니 그것으로 된 겁니다.

퇴근 후에 야간 진료를 하는 동네 산부인과에 남편과 아이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여보, 둘째다. 나 임신했다.

우리 이제 어쩌냐?"


이 아이는 자기 누울 자리는 보고 알아서 태어나는 복덩이구나.

불규칙한 스케줄에 일에 치여 죽는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였을텐데,

마침 퇴사와 함께 이렇게 둘째 임신 사실을 알게 되다니.

이건 정말 하늘의 계시인가, 장난인가.

믿기 힘들지만 위와 같은 일은 정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임신과 출산.

다시 저는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경단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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