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 바쿠, 순교자 묘지공원에서
신발 속의 발이 부풀어 오른다. 올드타운 구석구석을 돌아보느라 이미 하루치가 훨씬 넘는 걸음을 밟은 탓이다. 그래도 아직 해가 남았는데, 벌써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바쿠에는 놓쳐서는 안 될 야경이 있다고 하니, 아직 하늘이 밝을 때 업랜드 파크에 올라가 일몰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래, 이름부터가 업(up)랜드라니 가는 길이 내리막길일 수야 없음을 각오했지만, 뻣뻣이 굳은 두 다리로 또 중력을 거스르기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공원 바로 아래까지 운행하는 푸니쿨라가 있다고 하니, 노곤한 여행자에게는 무척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나는 푸니쿨라 탑승장으로 가는 최단 거리를 찾아, 올드타운의 서쪽 성문을 빠져나왔다.
이 도시에서 가장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전망을 가진 업랜드는, 사실 이미 두 눈이 멀어버린, 죽은 자들이 주인인 곳이다.
지난 백 년의 역사 동안, 몇 차례의 끔찍한 사건들을 거쳐오는 동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자들의 시신이 저 높은 언덕 위에 모여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들의 주검을 도시 바깥에 지천으로 널린 황량한 암석 사막 어딘가에 내던지지 않고, 도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곳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푸니쿨라로 가는 경로는 평범한 주택가를 관통한다.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심심한 동네로 접어들었다. 겨우 마주친 기척은 무심한 걸음으로 골목을 횡단하는 외로운 고양이 한 마리 정도. 인적이 드문 초행길은 사실, 여행 중에는 환영할 만한 것은 못 되는 법이다.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다 보니 다행히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어린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1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동네 아이들이 연립주택 현관 계단에 모여 앉아 꽤 큰 소리를 질러대며, 자신들이 이 골목의 주인임을 자처하고 있다.
별다른 놀거리 없이 수다와 농담으로 일요일 오후를 때우고 있던 아이들은, 일순간 갑작스럽고 집단적인 침묵을 통해, 낯선 생김새의 이방인들의 등장을 감지했음을 만천하에 노골적으로 알린다.
너무나 공공연한 이 기색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어 눈인사를 슬쩍 건네보지만,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마주친 밤길의 사슴처럼 팽팽한 긴장감으로 누구 하나 제대로 인사를 받아주는 아이가 없다.
대신에,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를 낮추어 거의 소곤거리다시피 긴급회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회의가 신속하게 의결된 모양이다. 아이들은 합의된 바에 따라, 비장한 각오를 각자 가슴에 품고, 자신들의 동네를 두리번거리며 가로지르는 동양인 두 명의 뒤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한다.
아제르바이잔의 전쟁과 독립의 과정을 짚어보면, 이 나라는 마치 ‘업랜드를 차지하는 자가 아제르바이잔을 차지한다’라는 신성한 계시로 역사를 시작한 나라인 것만 같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후 곳곳에서 벌어진 혼란스러운 내전의 불똥이 기름기 가득한 이 땅, 바쿠에도 날아들어 활활 타올랐다.
제국의 그늘이 걷히고, 주인이 사라진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볼셰비키, 멘셰비키, 아르메니아 혁명연합군, 터키군, 아제르바이잔의 군대, 심지어 러시아의 약진을 막으려는 영국군까지 뛰어들어 색색깔의 깃발을 앞세워 연합하며 이곳에서 맞붙었는데, 이 투쟁의 목적은 결국 ‘업랜드를 점령하라’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쟤들 우리 따라오는 것 같은데?”
남녀 아이들 다섯 명이 살금살금 간격을 좁히더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함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용건으로 뒤를 따라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여행자의 배낭을 노리는 추격전은 아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시선을 줄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어 버리는 것이, 범행을 공모하는 아이들의 대범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감지되지 않는다.
나의 시선이 날아갈 때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친구의 옆구리만 팍팍 쳐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십중팔구 “야, 야! 우리 본다. 본다!”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쑥스러움이 귀여워 슬쩍 웃음을 흘리자, 갑자기 남자아이 하나가 얕보지 말란 식으로 괜히 길가의 가로수를 걷어차기도 하고, 태권도 비슷한 동작을 해 보이는데, 아이의 의도에 반하여 조금의 위협감도 풍기지 못하고 그 순진무구함에 귀여움만 더해진다. 여자아이 하나가 쓸 데 없는 짓 말라며 다그치자 남자아이는 고맙게도 그 무시무시한 야수성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적극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이 뒤밟기가 은밀한 미행도 아니다.
기웃기웃 길을 찾는 극동 아시아인 둘과,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끝없이 수군수군 회의를 해가며 뒤를 따라오는 아제르바이잔 아이들 5인이 만들어내는 이 포토제닉한 퍼레이드는, 모른 척 하기에는 너무도 분명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으니 말이다.
1918년,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이곳 업랜드에 March Days에 죽은 12,000여 명의 사람들을 묻은 이슬람식 묘지를 만들었다. (이들의 죽음을 불안정했던 정국과 내전 과정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사건이라 주장하는 쪽이 있기는 하지만, 죽은 자들의 숫자와 그 편향성을 볼 때 이것은 분명한 무슬림 인종 학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윽고, 완전한 승기를 잡은 붉은 군대가 이곳의 시신들을 파내 다른 곳으로 옮기고 묘지를 완전히 파괴한다. 그들이 그 자리에 다시 세워 올린 것은 다름 아닌, 놀이공원이었다.
놀랍고, 또한 소름 끼치는 일이지 않은가. 파묻힌 시체들을 긁어내고 그 위에 놀이공원을 세운다는 그 발상부터 실행력까지. 세상 어딘가에 ‘올해의 가장 못된 생각’에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이 있다면, 아마 그 해에 12관왕은 충분했을 것이다.
공원의 이름은 키로프 Kirov 공원.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러시아 혁명을 이끈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의 멤버이자, 스탈린의 친구였던 세르게이 키로프의 이름을 붙였다.
마침내 도착한 푸니쿨라 탑승장은 이슬람 양식의 첨두아치 모양으로 지어진 유리 건물이다. 은은한 LED 불빛이 켜져 있고, 겹겹의 유리 뒤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레일이 길게 놓여 있다.
그 앞에서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자, 동시에 아이들의 행진도 안전거리를 유지한 곳에서 함께 정지하면서, 역시나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음을 자백한다.
그런데, 탑승장이 고요하다. 유리문이 굳게 닫혀있고, 건물의 안에도 밖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유리문에 붙어있는 시간표로 추정되는 숫자들을 몇 번이나 확인해도 지금은 운행시간이 분명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마주친 아내와 내가 사태를 파악하는 동안, 아이들도 다급하게 회의를 이어나간다. 우리보다 더 심각한 분위기다.
입구에 붙여놓은 임시 안내문 하나를 발견지만, 아제르바이잔 말로 쓰여 있어 해독이 불가하다. 대충 ‘고장으로 인해 운행을 중단합니다.’ 내지는 ‘정기점검을 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글이겠지만, 어찌 된 일인지 확실히 알아야 순순히 수긍을 하고 돌아설 것이 아닌가.
나는 우리의 먼발치에서 옥신각신 언쟁을 벌이고 있던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소비에트 연합이 무너지고 나서야 바쿠의 이 높은 곳의 신성성이 다시 회복되었다. 키로프의 동상과 함께 놀이시설들이 무너져 내렸고, 그곳에는 국가를 위해 유명을 달리한 자들의 주검이 다시 돌아왔다.
공산권 붕괴 시기에 수많은 작은 나라들에서 벌어진 일들과 마찬가지로, 아제르바이잔도 독립을 꿈꾸었고, 러시아는 이들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었다.
1990년 바쿠의 검은 1월 (Black January)에 사망한 시민의 수는 공식 집계 147명, 비공식 집계 300여 명. 이 동산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목숨을 빼앗겨야 했던 이들의 주검이 가장 먼저 돌아와 이곳에 묻혔다.
이어서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를 두고 아르메니아와 벌어진 전쟁 중에 사망한 이들까지 이 곳에 묻힌다.
이렇게 약 일만 오천 명의 죽은 몸이 이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낮으로는 푸르게 반짝이는 카스피해와 해가 저물면 아름답게 번영의 불빛을 반짝이는 조국의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헬로, 샬람. 미안한데, 혹시 영어를 말하나요?”
나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아이들은, 영어는 고사하고 아제르바이잔어 마저 몽땅 잊어버린 듯 모두 말문이 막혀, 몇 초간 아무 말도 없이 주변이 고요해진다.
잠시 후 아이들이 한 명의 아이를 툭툭 쳐 앞으로 내몬다. 아마도 사전에 자기들끼리 사절단 대표를 뽑아놓은 듯하다. 아이들 중에 그나마 가장 영어를 잘하는 아이였으리라.
대표직을 떠맡은 아이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긴장한 얼굴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예스 잉글리시 한다.
“이 푸니쿨라가 왜 문을 닫았죠?”
아이가 거의 달달 떨다시피 입을 겨우 연다.
“어…… 노 오픈…… 클로스……”
노 오픈. 물론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이유지. 만약 관리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 거라면 기다렸다가 타고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
“예, 닫혔네요. 왜 닫았죠? 여기 뭐라고 적혀있어요? 고장 났나요?”
아이의 입이 다시 달싹달싹거린다. 나와 아내뿐만 아니라, 잔뜩 긴장한 표정의 친구들의 시선까지, 모두 12개의 눈동자가 그 아이의 입에 맹렬하게 집중한다.
입을 우물우물하던 아이가 갑자기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을 비우더니, 친구들을 돌아보며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하소연을 하며 무언가 따지고 든다.
아마도 “왜 나한테 그래!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 정도의 화풀이가 되겠지.
더 이상 아이를 괴롭힐 수 없어, 오케이 땡큐 베리 머치 인사로 이 전격적인 회담을 서둘러 결렬시키고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인근에 지나가는 다른 사람도 없고,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탑승장의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다. 아내와 잠시 고민하다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으니 그냥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아이들에게도 검지와 중지를 거꾸로 까딱까딱 흔들어 걸어서 올라갈 거라고 뜻을 밝히고,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의 용건은 끝내 알지 못했으나, 겸연쩍이 손을 흔들어 우리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으로, 짧았던 동행길은 끝이 났다.
아제르바이잔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은 기껏해야 1991년 8월 30일의 일이다. 아직 채 30년도 지나지 않은 핏물 섞인 생생한 기억들이 이 높은 곳에서 저 아래를 향해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라는 소리다.
소위 동구권이라는 곳의 나라들 어디에서나, 나는 그 땅에 아직 축축이 적시고 있는 엄숙주의의 향기를 맡는다. 소련의 그늘 아래서든, 유고의 그늘 아래서든, 그들이 독립을 위해 맞서야 했던 탱크와 전차의 무한궤도 흔적이, 벽감에 새겨진 탄흔들이 아직 다 메꿔지지 않았음을 고스란히 몸으로 느끼게 된다.
전쟁과 투쟁 중에 죽은 자들의 시신이 아직 완전히 부패되지 않았기에, 망자들의 가족이 아직 생생한 그날의 기억을 등에 짊어진 채 삶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모두 자신 또는 가족들 중 누군가가 군인의 총과 삽에 피를 흘려야 했던 기억들을 고스란히, 뚜렷한 영상으로 머릿속에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운행이 중단된 푸니쿨라 철로의 옆을 따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파른 계단길을 부지런히 오른다. 이 고행에 보답이 될만한 아름다운 야경이 저곳에 있으리라, 서로 다독거리며 멈추지 않고 오른 덕분에, 아직 도시의 가로등이 밝혀지기 전에 마지막 계단을 밟을 수 있었다.
안도의 심호흡과 함께 뒤돌아 서자, 탁 트인 카스피해를 차경으로 한 바쿠의 번화한 풍경에 순식간에 체열이 식고 가슴이 서늘해져 온다. 오늘 한나절을 보냈던 올드타운의 조감부터, 바쿠의 랜드마크가 되는 몇몇 거대한 건축물들까지, 마치 관광 안내 지도처럼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아직 해가 넘어갈 때까지는 여유가 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또 다른 여자아이들 무리가 우리의 뒤를 졸졸 따라붙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용건들이신가 싶어 멈춰 서서 인사를 건네자, 다행히 이번에는 아까 아이들보다는 씩씩한 기백을 가지고 즉시 반응을 보여준다.
“코리아?”
“예스, 프롬 코리아.”
“BTS?”
나는 그제야 이 아이들의 용무를, 그리고 저 아래 골목에서 우리를 따라오던 아이들의 그 비밀스러운 임무를 눈치챘다. 우리는 BTS를 알고 있고, 그들을 좋아한다고, 그 한마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넘겨짚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한참이나 남아있는 우리의 캅카스 여정 내내, 조지아, 아르메니아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아이들로부터 이 메시지를 받아야만 했으니까.
“BTS? 예스, 아이 라이크 뷔!”
그 대답에 아이들이 떠나갈 듯이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어모으기 전에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와 같은 국적의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방방 뛰어오르며 좋아할 수 있다니, BTS에 고마워할 일이자 부당한 이득을 편취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한 일이다만,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익숙해져야 할 일이기도 했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365일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순교자 기념비에 닿는다. 거기에서 묘비가 촘촘하게 늘어선 순교자의 거리를 따라 다시 전망대 쪽으로 내려오자, 야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좀 더 늘어나 있다.
잠시 후, 도심에 촘촘히 박힌 LED 가로등의 쨍한 불빛이 하나씩 밝혀지고, 이제 하늘빛이 충분히 어두워지자, 바쿠의 명물 플레임 타워에도 드디어 불빛이 들어오면서, 마침내 바쿠의 찬란한 야경을 완성했다.
놓치고 갔더라면 아쉬웠을 야경임에 분명했고, 땀 흘리며 올라온 걸음이 전혀 아깝지가 않은 풍경이었다. 아내와 나는 난간에 걸터앉아 이 고요한 풍경을 마음껏 만끽했다.
거룩함이 감도는 이 언덕 위와는 달리 저 멀리 아래서는, 살아있는 것들의 필연적인 소음이, 거대한 짐승의 묵직한 심장박동처럼, 웅웅거리고 쿵쿵거리며 생명을 뽐내고 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아까의 소녀들도, 저 속에 섞여 BTS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얼마간의 데시벨을 보태고 있을 것이다.
온몸으로 총알과 죽음을 받아낸 자들의 시신으로 쌓은 이 방벽의 언덕 위에 올라서서, 그 순간 내가 이 곳을 위해 바랄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아이들이 또다시, 총을 겨눈 군대의 눈을 피해 숨을 죽이거나,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들지 않을까 납작이 엎드려야 하는 일 없이, 마음껏 소리 지르고 춤추며, 꿈꾸고 배우며 건강히 자라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