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야채 청과물

by 장서윤

출판사 보름산미술관에서 발간한 그림책 <감정동 사람들>의 에필로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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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3가지, 12가지, 100가지 습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정리 정돈이다.


정리 정돈 중독자로 살아온 지 어언 20년,

(희미한 기억 속 유년기는 제외한다.)


성공하는 습관 ‘정리 정돈’의 잘못된 예를 소개하려 한다.


나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흐트러진 모습을 싫어한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 정리는 기본

자다 흐트러진 매트리스 커버 위치는 정확히 각을 맞추고

베개는 침대의 정중앙에 정리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도착한 택배는 바로바로 정리

책상 위 필기구는 필요한 것만 간단히

노트는 쓰고 서랍에 크기별, 두께별로 정리


책은 장르별로, 높이별로 책장에 가지런히

옷은 계절별로, 색상별로

원피스, 치마, 바지는 길이별로 나란히

파자마는 절대 이틀을 넘기지 않게

항상 각이 져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심지어 그림 속 물건들도 차곡차곡, 종류별로, 칸칸이

세상에 이런 청과물점이 어디 있나

대형마트도 이런 식으로 청과물을 진열하진 않는다.

나는 아마 장사를 해도

물건 파는 것보다 정리하는 데 종일을 허비할 것이다.


방금 손님이 두리안 2개 사 갔는데 남은 1개는 어쩌지?

고추가 너무 안 나가서 다른 물량이랑 수량이 안 맞는데...

아스파라거스가 길이가 들쑥날쑥해서 지저분해 보이는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대출금도 다 갚기 전에 말아먹을게 뻔하다.


그런데 나는 정리를 좋아할 뿐 청소는 즐기지 않는다.


책장과 오디오, 테이블 위에 쌓인 먼지들이며

창틀에 쌓인 먼지는 어떻게 청소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결정적으로 나의 정리 습관이 성공한 사람의 행동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흐트러진 모습이 보기 싫어서 일 자체를 시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뭔가 그리고 싶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아, 이거 또 언제 그리고, 언제 완성해서 정리하지

합판은 어디다 꺼내 놓고 물감은 어떻게...


이 생각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가도 욕구가 꺾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단순히 ‘정리’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 혁신, 그 시작

지은 야채 청과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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