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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윤 Jul 24. 2021

아이 혹은 어른

행복도 진절머리 나게 몰려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사소하게 시작해서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끝도 없이 밀려오는 기분.


아침부터 난데없이 찾아온 빈혈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저혈압도 아닌데 무슨 빈혈인지,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시 일어나기가 겁나 오후가 가까워질 때까지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tv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오전.

옆방 언니로부터 카톡이 하나 왔다.


오늘 거기 갈까?


답장 대신 옆방까지 들릴 정도로만 까슬까슬한 첫마디로 “좋아”하고 답했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일어나 요구르트와 발포 비타민을 챙겨 먹고

나는 노트북을, 언니는 책 한 권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목적지는 차로 15분 거리의 동네 북카페.

외진 곳에 있어 사람이 많지 않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우리만의 아지트다.

그날은 평소와 달리 늘 주차하던 공영주차장이 아닌 카페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들어선 카페에는 역시나 썰렁했다.


적당한 에어컨 바람, 적당한 음악 소리.

3시간 정도 자리에 앉아있자 엉덩이가 배겨오고 노트북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언니 역시 집중력이 다했는지 맞은편 자리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슬슬 일어나 볼까.”

노트북을 정리하며 집에 갈 준비를 하자 언니도 책을 정리하며 트레이와 커피잔을 들고일어났다.


다시 도착한 주차장.

주차장 근처 작은 컨테이너에서 요금 정산하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얼마인지 묻자 아주머니께서는 2,000원이고 현금만 받는다 하셨다.

그런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손을 뒤적여 다시 가방 속의 지갑을 찾고 있었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 지갑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던 찰나, 아차, 오늘 한 번도 지갑을 꺼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성 페이는 위험하다.)

언니를 쳐다보자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도 삼성 페이를 이용한다.)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아주머니께 계좌이체도 가능한지 물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단호히 불가능하다 하셨다.


이때부터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급하게 차 앞 좌석의 동전 지갑을 열어봤다.

1,500원이 들어있었다.


근처 편의점이나 은행에서 인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주차장 건너편에 오래된 편의점이 하나 보였다.

언니와 나는 다급히 편의점에 들어가 현금 인출기를 찾았다.

편의점 가장 구석에 자리한 낡은 현금인출기는 핸드폰 페이 기능이 갖춰져 있었으나 전혀 작동이 되지 않았다.

카카오페이, 삼성 페이를 번갈아가며 언니 핸드폰, 내 핸드폰을 가지고 30분간 씨름했다.


결국 돈은 뽑지 못하고 핸드폰 배터리 5%만 남았다. 별 소득도 없이 다시 건널목을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주차 요금은 3,000원으로 올랐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단호하셨다.

카드 금지. 계좌이체 금지. 무조건 현금.

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 우리 둘이 별 방법이 없다는 걸 아셨는지, 아주머니는 결국 계좌이체로 3,000원을 받으셨다. 40분 만의 석방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진이 다 빠졌다.

‘오늘은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없겠어.’

씻고 침대에 눕자 이상하게 눈물이 찔끔찔끔 흐르더니 나중에는 폭포수가 되어 흡사 오열을 했다. 아침 빈혈부터 주차요금의 사건이 부풀어진 풍선을 터트리는 바늘의 역할을 제대로 해준 것만 같았다.

일하면서 받은 서러움, 무시당하는 느낌, 잘하려 해도 잘 풀리지 않던 일들.

오늘 하루를 곱씹으며 근래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까지 더욱 서럽게 느껴졌다.


오늘 아침 빈혈만 없었어도.




어느 작가는 행복한 순간이 슬프다고 했다.

행복은 삶을 살아가며 만나기 드물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언니에게 이 말을 하자 그게 아이와 어른의 차이라 말했다.

아이는 행복한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만,

어른은 행복을 만끽하지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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