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신 케이 Jul 31. 2020

활짝 웃어주었다

스토리포토그라피100

스토리 58 - 활짝 웃어주었다


Yashica T4, Fomapan 400 / 금호동, Seoul, S.Korea - Mar


어느 날. 

시간이 자연스레 지나서 나도 자연스레 집에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 출발 또는 새로운 스테이지로의 이동을 준비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짐을 정리하고, 새로움과 설렘이라는 이유로 과감히 버릴 것은 버렸다. 아끼던 코트들도 이젠 너무 어린 티가 나는 것 같아 버리고, 언젠간 쓰겠지 하며 꽁꽁 모아놨던 전자기기들도 버리고, 우연히 발견한 10년 전 싸구려 커플링도 왠지 오글거리는 마음에 그냥 전부 버렸다. 하지만 그중에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물건이 있었다. 하얀색 컨버스 신발이다.


처음으로 산 컨버스 신발은 아니지만, 이렇게 질긴 녀석은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우린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비가 올 때나, 꽃이 필 때나, 눈이 올 때나, 태풍이 불 때나 여하튼 간 5년을 내내 같이 했다. 천으로 만들어진 주제에 어찌나 그렇게 튼튼하던지 온갖 날씨도 다 견뎌주었고, 심지어 같이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다. 그렇게나 혹사당하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던 녀석이지만 역시 시간이 지나니 색이 변하고, 밑창도 얇아지더라.

 

사실 이전부터도 신발 끈을 묶으면서 살짝살짝 보이는 튀어나온 실밥에 이 녀석과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신발 끈이 묶이면 딱 이쁜 모양이 되어 "아직 괜찮네~"하곤 넘어갔었다. 그리고 시간은 역시 빠르게 흘러왔다. 쭉 느껴왔던 대로 이제는 정말로 이별의 시간이 되었다. 난 추억이 많은 이 녀석을,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를 통속으로 던져 넣고 돌아왔다.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신을까..' 고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밀어 넣었다. 말이 좋아서 재활용이지, 사실상 버리고 온 것이 아닌가. 아이고. 사람이 신발에게 슬픔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이 친구는 그저 제 역할을 충실히 했던 물건일 뿐이고 난 또 똑같은 색의 똑같은 모델을 사면 그뿐인데 말이다.

왜 신발한테 슬플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알겠다. 새 출발에 앞서 묵었던 것들을 정리할 때 다시는 못 보게 되는 이 상황이 지금은 물건이지만, 다음번 새 출발, 또 그 다음번 새 출발에 정리되는 상황은.. 친구나 연인 그리고 부모님이겠구나. 음 어떻게 보면 이게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구나..라는 감정이 솔직하게 느껴져 왠지 모르게 슬펐던 것이다.


@ 무더운 여름에도 긴 청바지에 컨버스 하이를 즐겨신습니다. 조금 더워 보일까요? =)



물건이긴 하지만 아끼던 무언가와 이별이라고 하는 마지막 순간에 찍은 나름대로 슬픈 사진이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경험이 쌓일수록 어떤 면에서는 감정이 무뎌져 간다. 이럴 때 슬픔이라는 감정은 그동안 무뎌져 가던 여러 감정들을 화산이 폭발하듯 다 쏟아내게 해 준다. 그래서 한바탕 울고 나면 개운하고 또 세상이 다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슬픔과 어울리는 필름은 단연코 흑백 필름이다. 감정을 담으면 흑백사진에서도 여러 가지 색을 표현할 수 있다.



이전 13화 극도로 피곤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