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하는 모든 것에는 경계가 있다.
사무라이의 장검처럼 날카로운 경계도 있고, 바다와 하늘 사이 수평선처럼 따스한 경계선도 있고, 해변의 파도처럼 움직이는 경계도 있다. 자연의 경계는 직관적이어서 어디까지가 끝이고, 어디서부터가 시작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일에도 경계가 있다. 경계를 넓히기 위해, 경계를 밟지 않기 위해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간다. 경계가 삶에 동력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인간의 머리속에서 나온 경계는 논리필연적으로 관념적이어서 시작과 끝을 알기 어렵다.
공무원에게도 경계는 공직의 동력이다. 부처별, 국실별, 부서별, 직책별 업무 경계는 개별 부서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업무의 경계가 권한의 근거이니 경계를 침범하는 것은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다. 업무의 경계가 책임의 한계이니 경계가 넓어지면 책임의 범위도 넓어진다. 공무원은 누구보다도 업무의 경계에 민감하다. 공무원은 손익으로 평가받지 않고, 공과로 평가받는다. 경계로 평가받는다. 어떤 업무보다도 업무분장에 더 민감하고 세련된 감각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삶에 경계가 겹치듯, 공무원 업무의 경계라는 게 항상 겹쳐있다. 겹쳐진 업무는 누구라도 하면 된다. 누군가 해 놓으면 나머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 성과를 낼 수 없는 일을 맡아오면 아무리 고민하고 기획하고, 열심히 보고서를 쓴다 해도 멋진 성과를 내기 어렵다. 품은 품대로 들어가고, 책임과 처벌의 위험에 노출된다. 성과가 날 수 있는 일은 시작하는 순간 성공이 보장된다. 당연히 서로 하려한다.
업무의 경계를 정하는 능력은 공무원의 업무능력을 알 수 있는 가장 민감한 지표다. 업무분장은 부서의 사활을 거는 일이면서, 조직의 집단지성이 총 동원되는 절정의 순간이다.
업무의 객관적 기준은 있는가. 단언컨대, 없다.
업무분장 기준을 아무리 만들어도 빈 공백은 있게 마련이고, 세부기준을 아무리 구체화해도 여러 영역에 겹치는 업무는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많은 시간 업무분장에 공을 들인다.
업무분장의 비책이 있는가?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내가 터득한 방법을 하나 소개해본다. 뭐 도움이 될 수도, 쓸데없는 이야기일수도 있다.
책임에 민감한 공무원 사회에서 ‘하고 싶은 업무’를 누가 담당해야하는가 하는 업무분장의 문제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하고 싶지 않은 업무’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만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업무가 누구의 업무인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까지 버티면서 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누가 움직이는가를 보면 된다. 이것은 객관적인 업무 값의 문제가 아니다. 상급자의 의지, 부서의 역학관계, 국민의 인식, 그간의 관례, 업무담당자의 성격을 모두 시소에 올려놓고 어디로 기울어지는지 상상해보아야 한다. 직무상 상상력이 필요한 시간이다. 고민하고 상상해보면 누가 움직일런지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면 된다.
상상한 결과 업무분장 시소가 내게로, 우리 부서로 기울어질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공무원은 그때도 자포자기하거나 울고 있으면 안 된다. 상대측 시소에 추를 하나 더 달거나, 내 쪽의 불리한 추를 덜어내야 한다. 법령과 판례는 기본이다. 상급자에게 새로운 보고자료를 넣던지, 부서장에게 강력하게 주장할 것을 요구하던지, 새로운 관례를 찾아내던지, 타부처 사례를 찾아내야한다. 확실한 건 상대측에 추를 달고, 우리의 추를 덜어내는 것이다. 당장에 알기는 어렵지만, 그러고 나면 점점 시소는 상대에게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 된다.
공무원 역량의 절정을 쏟아부어 행정의 경계를 찾아낸다.
행정의 경계란 파르르 떨고 있는 ‘행정의 나침반‘이다.
업무분장이란 최선의 지름길을 찾아내는 행정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보고서 작성은 업무분장 이후의 문제다.
그러고 보면, 보고서작성은 업무분장의 종속변수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