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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고 빛나던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된다.

(감사에서 살아남기)(9)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138631250


<굳고 빛나던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된다.>


부처의 모든 직원이 청렴서약서를 작성하고, 청렴교육을 필수적으로 받는다. 위반하면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문서에 날짜를 쓰고 서명한다. 예외는 없다. 청렴과 반부패 뿐만 아니라 갑질근절, 성희롱예방에 대한 교육이나 서약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부패사건, 갑질사건, 규정위반에 대한 신고는 이어지고 신고에 따라 감사실은 언제나 감사중이다.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서약했지만, 감사를 시작되면 모두다 억울하다거나 처벌이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한다. 그들은 ‘감수’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시 한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으로 날아갔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중 부분)


서약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 줌 티끌 같은 것일까.


‘서약서’를 쓰라는 규정은 없다. 있던 의무가 쓰지 않는다고 사라지지도 않고, 없던 의무가 썼다고 생기지도 않는다. ‘선서’도 마찬가지다. 선서나 서약을 했다고 더 세게 처벌받지도 않는다. ‘선서’나 ‘서약서’는 시무식 식순이나 관례에 따른 포즈(pose) 같은 게 아닐까. 의미를 부여한다해도 규정 환기차원의 강조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서약서를 작성하지 않아 관련 규정을 몰랐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법학에서 ‘법의 부지는 용서되지 않는다’라는 원칙이 있다. 관련 규정을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법 위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규정위반이 원칙이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인 줄 알았다는 주장은 재판에 가면 의미 있는 주장은 될 수 있겠다. 그러니 서약서 작성하건, 그렇지 않건 감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공직생활을 하다보면 각종 서약서를 작성할 일이 생긴다. 각종 선발심의, 계약심의, 문책심의, 자문회의, 이권 관련 회의 등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서약서’를 쓰곤 한다. 회의의 내용은 모두 다르고, 문서의 이름이 다양하다고 해도 마지막 문장은 대부분 비슷하다.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는다’는 마지막 문장에 움찔할 필요는 없다. 보험의 약관과 같은 의례 박혀 있는 문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보험약관은 꼼꼼히 봐야하지만, 서약서의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는다’는 문장은 신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법 위반 사실이 확인되면, 서약서를 쓰건 안 쓰건 처벌받는 것이다.

감사가 시작되는 순간, 서약서의 굳고 빛나던 맹서는 한 줌 티끌이 되어 버린다. 한숨의 미풍에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서약서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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