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서 살아남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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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뉴스 정치면, 사회면 한구석 어딘가에는 부정부패 기사가 있다. 댓글에는 ‘깨끗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저렇게 대담한 사람이 있느냐’며 혀를 찬다. ‘예전에 비해 투명해졌다’고 말하는 사람고 있고, 예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은 '다 뜯어고쳐야 한다'고 분개한다. 부조리, 불공정, 부패한 공직자는 누구인가.
감사, 징계, 수사, 재판 업무를 오래 했다. 많은 비위자를 조사하기도 했고, 비위자를 위해 조언하기도 했다. 그들은 용감한 악당이라기보다는 평범하고 소심한 동료였다.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하나같이 억울해했다.
비위자들 대부분은 어쩌다 저지르게 된 사람이다. 처음 보직을 받고 ‘이렇게 해도 되나’라고 갸웃거린다. 전임자도 그랬고, 전임자의 전임자도 그랬고, 다른 기관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나면 ‘이렇게 해도 되나 보다’하고 업무를 처리한다. 점점 요령이 생기고, 요령에 요령이 생기며 무감각해진다.
관행은 관성이 있어 되돌리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규정대로 한답시고 관행을 바꾸려다 새로운 민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른 부서와 업무 충돌이 발생하거나, 부서장을 이해시키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전임자들은 원만히 처리했던 업무를 삐그덕 거리게 만들면 상사로부터 업무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다. 사업은 진행되어야 하므로 규정에 따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쉬운 것이 아니다. 책임의 원점이 되기 싫어, 민원을 안 만들려고,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튀지 않으려고, 대안이 없어서, 실무과 규정이 맞지 않아 관행대로 업무를 처리한다.
부조리한 관행에 대해 감사가 개시되면 비위자들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하고 억울해 한다. 비위자는 자신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억울하다. 제도나 시스템의 문제를 실무적으로 극복한 것이며, 오히려 적극행정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비위자들은 부조리한 관행을 업무요령이라는 이름으로 전임자들에게 인수받기도 한다. 조금씩 젖어가 부조리를 자신의 기준으로 합리화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부조리는 적극적 결단이라기보다는 소극적 방임, 소심함, 게으름 같은 것이다.
많은 부조리한 관행들은 피해자가 없거나, 피해자가 피해 받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다. 민원을 감수하면서 불공정한 관행을 이어갈 공직자는 없다. 권리의식이 향상되어 바로 민원을 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결과 확인되는 부조리의 피해자는 대부분 국가다. 국고와 공익이다. 사업 부서는 업무상 필요하고, 상대에겐 편의가 제공되면 이의 제기할 사람은 없다. 부조리가 관행이 되는 과정이다.
여러 사례가 있겠지만 공공시설에 대한 사용수익허가를 살펴보자. 사용수익허가는 사용료를 받고 공공시설을 민간인이 사용하도록 허가하는 것이다. 사용료는 해당기관이 아닌 국고로 납입된다. 사용료를 많이 받아도 그대로 국고로 들어가니 해당기관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해당기관으로서는 사용료를 많이 받거나, 사용장소, 사용시간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할 동기가 적다.
카페 운영업체가 사용수익허가된 부분보다 넓게 사용한다고 해보자. 해당기관은 넓은 공간을 묵인하는 대신 업체와 추가 협상하여 음료 가격을 낮출 수도 있다. 직원이나 민원인들은 싼값에 넓은 카페를 이용하니 이익이다. 업체는 낮은 사용료로 넓게 사용하니 역시 이익이다. 카페로 허가가 났지만, 라면이나 토스트 등 간단한 요리를 판매한다고 해보자. 직원들은 편리하고 업체는 매출이 올라간다. 업체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해당기관에 기부금을 낼 수도 있다. 어떠한 민원도 발생하지 않는 구조다. 피해자는 누구인가. 바로 국가다. 국가로 들어가야 될 사용료가 걷히지 않는 것이다. 업종에 대한 심사를 받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는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어차피 방치된 공간에서 모두가 쾌적하고 저렴한 가격에 카페를 이용하고, 직원들 아침식사도 제공하고, 건물관리까지 되니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 새로 보직된 담당자가 이를 되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감사관이 규정위반이라고 지적하면 무엇을 위한 감사냐며 감사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국유재산 사용권을 임의로 처분하지 않아야 하고, 사용범위를 준수하도록 해야 하고, 사용료는 국고로 납입시키고, 해당 기관에 필요한 돈은 예산심의를 받아 수령 후 사용하라는 것이다.
부패는 겁주며 갑자기 다가오지 않는다. 다들 그렇다며, 아무 일 아니라며 달콤하게 곁에 선다. 어느새 비위자는 ‘나는 그들보다는 낫다’며 안심하게 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다. 그저 속담인 줄로 알았었는데 유장경의 시 ‘별엄사원’에 나오는 말이다. 시인은 젊은 시절 공부하면서 훗날 백성을 위한 훌륭한 선비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진사가 되어 도시로 떠났다. 늙어 방문한 고향에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떠올려 본다. 관행에 젖어든 늙은 관료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의 ‘細雨濕衣看不見(세우습의간불견)’의 백미는 ‘看不見(간불견)'에 있다.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젖어들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젖지 않으려고 눈을 부릎 뜨고 있었지만, 어느새 축축해진 소매를 느끼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비위자들은 용감한 악당의 배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부조리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범하고 소심한 공직자다. 근무경험이 쌓이면서 요령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무뎌갈 뿐이다. 사람은 세월에 젖어가지만, 시대는 최신 기준으로 업데이트된다. 가만히 있으면 시대정신에서 멀어지게 된다. 요령과 관행에 젖어 노곤히 있다 어느 순간 비위자가 된다. 시인 유장경은 보고 있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하지 않는가.
별엄사원 - 유장경 -
서늘한 봄.
배에 몸 실으니 발아래 물 가득,
안개인 듯 빗방물인 듯 하얀 세상.
하얗기만 한 물방울에 어느새 촉촉해진 옷소매
소리 없이 떨어지는 꽃은 강가에 쌓여 색을 잃어가네
기울어 가는 석양 따라 그림자도 늘어만 가는데
그 시절을 떠난 이곳에서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그대가 보고 싶네
누가 내 안부를 묻거든
관직의 하루하루에 젖어 지조는 낡아졌고,
선비 되기는 이미 글렀다고 전해주게
(시구가 감동적이어서 번안에 가까운 해석이지만 써본다.)
別嚴士元 -劉長卿- 별엄사원 - 유장경 -
春風依棹闔閭城 춘풍의도합려성
水國春寒陰復晴 수국춘한음부청
細雨濕衣看不見 세우습의간불견
閑花落地聽無聲 한화낙지청부성
日斜江上孤帆影 일사강상고범영
草綠湖南萬里情 초록호남만리정
東道若逢相識問 동도약봉상식간
淸泡今已誤儒生 청포금이오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