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만난 예쁜 아이들 13화
어른이 된다는 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을 무기력감 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부쩍 크는 게 느껴진다.
2011년, 6학년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J는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남학생으로, 잘하려는 욕심이 많고 조금은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이였다. 그래서 아이가 가진 능력에 비해 인정을 잘 받지 못했다. 친구들은 이해심이 부족하고 잔소리를 많이 하는 J와 같은 모둠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다툼이나 갈등도 종종 있었다. J는 자신의 생각과 기대보다 친구들이 잘 따라오지 않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예민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저 상쇄 됐어요."
"어? 상쇄가 뭐야?"
"아, 사물놀이 할 때 리더 같은 거예요."
그 당시 J는 학교에서 하는 사물놀이 동아리를 했다. 아침에 나와서 연습하는 학생 동아리로 학교 학예회에서 공연하거나 근처 마을 축제 공연을 가는 등 꽤 수준 높은 연주를 하는 동아리였다.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인 동아리에서 사물놀이를 이끌어가는 상쇄 역할을 맡았으니 자랑이 절로 나올 수밖에. J는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한껏 기분이 업되어 나에게 상쇄가 뭔지 종알종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기분 좋았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J는 동아리 활동을 힘들어했다.
"선생님, 애들이 자꾸 아침에 늦어요."
"박자가 안 맞고 장난만 쳐서 힘들어요."
사물놀이 리더가 되어 동아리를 이끌어가는데 후배들이 생각보다 잘 안 따라왔나 보다. 지각을 자주 하고, 연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J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J의 성격을 잘 알기에 얼마나 힘들지 눈에 보였다.
"J야,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정말 많아. 그럴 때는 그냥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해지더라."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것.
말은 쉽지만 어른조차도 하기 힘든 일이란 걸 안다. 마흔이 넘은 현재도 잘 안되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 당시 내가 J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2학기 가을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1학기와는 다른 J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우선 표정이 편안해졌다. 교실에서 친구들과 다툼이 줄어들었고, 인상도 좋아진 것 같았다.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왠지 동아리 때문 같다는 생각이 딱 스쳤다.
J를 불러 이야기를 했다. 요즘 동아리 생활은 어떠냐고.
그런데 그때 J의 말이 놀라웠다.
"선생님, 그냥 스트레스받을 때는 꽹과리를 엄청 쳤어요. 치니까 스트레스 풀리고 실력도 늘더라고요. 그리고 화내봤자 바뀌지 않은 일은 그냥 냅~~~뒀어요."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게 적기 어렵지만, 냅~~~ 뒀어요. 는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세상 통달한 사람처럼 길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기에.)
오...
꽹과리를 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구나.
그게 또 실력 향상으로 이어지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는 신경을 덜 쓰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전보다 여유가 생기니 후배들도 더 잘 따르고 그러다 보니 신경 쓸 일도 줄어들고.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J는 학기 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갔다.
너그럽고 인상 좋은 아이.
그리고 공부도 사물놀이도 잘하는 만능캐릭터.
그 해, 학예회 사물놀이 공연은 정말 최고였다.
맨 앞에 앉아 신나게 꽹과리를 치던 J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밝은 표정으로 옆의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리듬을 이끌고 가던 J는 내가 모르는 어떤 경지에 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J는 그 누구보다도 멋진 6학년 2학기를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을 내려놓으면서 그렇게 성숙해졌다. 반에서도 인정받고,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러워했다. 워낙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은 친구라 중학교 가서도 잘 지낼 것이다. 부족했던 부분은 자기 스스로 깨우치고 바꾼 아이라 더더욱 걱정이 없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아들을 낳으면 꼭 사물놀이나 드럼을 가르쳐야지 하고 생각했던 게. 드라마틱한 J의 변화가 사물놀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두들기고 치면서 나름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을까.
그리고 적절한 좌절이 내 아이에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 좌절에 힘든 시간을 보낼지라도 결국은 이겨내고 넘긴다면 한층 성숙해질 아이를 만날 거라고 믿으니까.
J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