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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14. 2019

어느 날 천사가 말했다

내 정체성과 본질

나는 희귀난치성질환자다.


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어딜 가나 머리만 대면 자서 "잠을 잘 잔다니 복 받은 거다. 넌 정말 건강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수업시간이나 차 안에서 늘 꾸벅거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 몸의 상태보다는 결과였다. 아무리 졸아도 시험성적이 잘 나오면 괜찮은 거였다. 내 컨디션은 유조선에서 유출된 까만 기름을 뒤집어쓴 채 퍼덕거리는 새 한 마리 같았는데 말이다. 끈적한 피곤이 몸을 뒤덮어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고 눈꺼풀과 아랫눈에 자석이 달린 것처럼 엉겨 붙어 떨어트리기가 힘겨웠다.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여덟 시간, 아홉 시간을 자도 밤을 새운 것처럼 졸렸다. 아침 만원 마을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가는 동안에도 서서 졸았다. 침대에 잠겨 들어 올리기 힘든 나의 팔다리를 온 힘 다해 끌어내 주던 가족들이 있어서 나는 '건강한데 잠이 좀 많은 아이'로 살 수 있었다. 책상에 코가 닿도록 조는 나에게 아침마다 손으로 당근을 갈아서 즙을 내주던 엄마, 홍삼이나 약포도즙 등 건강에 좋다는 음식을 퇴근길마다 봉지에 사 오던 아빠. 좋다는 음식을 먹어도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기운이 없었지만 한 문제 더 풀고 동그라미를 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늘 조금씩 더 위로 가야지만 무기력한 내가 쓸모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뇌가 호르몬을 만들지 않는지도 모르고 허벅지가 얼얼하게 꼬집으며 수업을 듣고 교실 뒤를 걸으며 책을 보던 아이. 20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에게 '병인지 몰라서 미안하다, 수고했다.'라고 말하며 꼭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오늘도 나는 증상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병을 떼어내 없애거나 백혈구가 싸워 이겨버렸으면 좋겠는데. 아직 기면증의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모르고 뇌의 호르몬 이상이라는 것 정도가 밝혀졌다. 이 병에 걸리면 잠을 잘 때와 깨어났을 때의 경계가 없다. 수면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 에너지가 충전되는데 내 뇌는 접촉 불량이다. 잠을 자도 뇌가 깨있어 계속 방전된다. 그렇게 차곡차곡 피곤이 쌓이고 정신을 맑게 깨우는 호르몬을 만드는 공장도 계속 파괴되는 중이라고 한다. 점점 고장이 심해지는 충전기 사용법을 익혀야 산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 현장의 새 한 마리. 출처: 환경보건시민센터


질병을 치료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알것이다. '강제, 강압, 폭력, 위압, 협상, 강요' 등 어떤 단어도 병명을 듣는 순간을 설명할 수 없다. 선고받는다고들 하지만 죄없는 나에게 쓰기엔 너무 일방적이고 잔인하지 않은가. 원래부터 내 몸에 있던 병이니 진단 결과가 바로 내 정체성이다. 결과를 듣자마자 수용해야 한다. "중증 기면증입니다. 당신 뇌에 장애가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수십 개의 센서를 몸에 달고 이틀간 기록한 색색깔의 그래프와 숫자들이 증명한 기면증 증상이 내 것이란다. 이십 대 후반에 ‘희귀 난치성 질환 기면증 환자’선고를 받았다. 동정녀 마리아라도 된 기분이었다. 태어나 성관계를 한 번도 안 가졌으나 “뱃속에 예수님을 임신했으니 그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천사에게 들었다니 그녀라면 내 기분을 조금은 이해하지 않을까.


환자들은 확진을 받으면 "왜 내가?"라며 힘겨워하는 게 클리셰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은 의도적으로 피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물어봤자 답이 없으니까. 왜를 묻지 않으니 적막만이 남았다. 처방받은 약을 수동적으로 먹고 각성효과와 부작용이 내 몸에 곳곳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걸 관찰했다. 지금보다 더 위로, 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던 내 시간이 멈췄다. 병에 걸린 이유를 묻지 않고 아껴둔 물음표를 내 삶에 던졌다. '나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지?' 지금까지는 매 순간 내가 선택한 결과들이라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남보다 더 빨리 더 잘하고 싶었다. 나보다 남이 기준이었다.


끊임없이 부정한 내 진짜 모습은 난치성 질환자였다. 달리기를 멈추니 주변 사람들이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어졌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뛰고 있었으나 사실은 모두를 밀어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혼자 덩그러니 남아 2000명 중에 한 명 꼴로 뇌에 나와 같은 장애가 생긴다는 무의미한 통계로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에 찍힌 내 병의 좌표를 가늠할 뿐이다. 선고를 받고 나니 그제야 그동안 남들과 같은 속도로 뛰기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진득한 졸음 때를 온몸에 휘감고서 부릅뜬 눈으로 잘도 퍼덕거리면서 목적지도 모른 채 뛰어다니던 지난날. 자나 깨나 한참 멀리 있는 높은 곳만 목이 빠져라 쳐다봤다.


뜀박질을 멈추니 어딜 봐야 할지 몰라 고개를 떨구고 하염없이 내 몸을 봤다. 아무리 잠을 자도 감기던 눈을 치켜뜨고 남들을 보느라 놓쳤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 천사가 나에게 내 몸에 낫지 않는 병이 있다고 한 그날부터 나는 제자리에 서서 부는 바람을 맞고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는다. 제대로 충전이 안 되는 몸은 늘 에너지가 없어 깜빡이지만 단어들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글을 짜기엔 충분하다. 모두의 속도에서 벗어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주려고 질병이 내게 심겨있었나 보다. 쏟아지는 달빛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팠던 나의 모든 시간을 은빛으로 적시도록 가만히 눈을 감는다. 늘 잠이 쏟아지는 나에게서 피어날 꽃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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