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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23. 2019

우리의 여행법

非夢似夢 비몽사몽

인생 여정이 녹록지 않은 우리들에겐 작정하고 떠나는 여행이 다른 의미의 천국이랍니다. 시차 적응도 필요 없어요. 저희의 몸은 비행기를 타고 날짜변경선을 건너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시차 적응 중인 상태와 같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다른 나라로 갔을 때는 바뀐 낮밤에 피곤을 느끼지 않는답니다.


비행시간이 길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좌석벨트를 매고 눈을 감으면 1분 안에 깊은 잠으로 빠지거든요. 정신없이 자다가 승무원의 손길에 감기는 눈을 겨우 뜨고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나서 빈그릇을 카트로 가져가기도 전에 다시 꿈나라로 떠납니다. 기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침대가 있는 기차도 없는 기차도 상관없습니다. 열 시간 넘게 버스나 배를 타고 가는 여행도 괜찮아요. 우리 집 침대마냥 어디서든 잠에 빠지니까요.


눈을 감았다 뜨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호수와 산이 빛을 내며 창밖으로 지나갑니다. 풍경을 잠시 보다 감기는 눈꺼풀을 굳이 열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마음 편히 기차의 철바퀴가 선로를 지나며 만드는 진동에 몸을 맡겨요. 그렇게 잠 속에서 허우적대다 일어나니 오래전 책에서 읽은 피노키오가 살 것 같은 나무로 된 집들과 마을을 스치는 중이네요. 주섬주섬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먹고 흔들리는 기차의 좁은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꿈나라로 갑니다.


마음껏 잘 수 있는 비행기, 기차, 배, 버스, 봉고차 등 이동수단을 사랑합니다. 어느 관광지를 가든 잠시 눈을 붙일 곳을 먼저 찾지요.


우리는 잠자리도 까다롭지 않아요. 침낭만 있으면 공원 벤치에 누워도 몇 초만에 바로 잘 수 있으니까요. 유럽의 청년들이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 떠들며 돌아다니는 2층 침대 6인실 혼숙 유스호스텔에서도 세상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답니다. 보통은 숙소의 가격과 수면의 질이 비례하는데 저희는 1박 15,000원이나 150만 원이나 눈만 감으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답니다. 깊은 산속 텐트 안에서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는 것도 잠시, 동료가 그만 좀 일어나라고 깨우는 아침을 맞게 돼요.


북적이는 유명 관광지가 좋은 점은 어디든 걸터앉거나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있을 수 있다는 점이랍니다. 여행지에 가면 인증샷을 찍는 사람만큼이나 지친 다리와 몸을 땅에 기대 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저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갑자기 누워서 딱 10분만 자고 일어나야 하는 컨디션이 되는 순간들이 오는데요. 뇌에 호르몬이 부족해 시도때도 없이 잠의 공격을 받아서 그래요. 그치만 일상에서 내 맘대로 짧은 휴식을 취하기란 불가능하죠. 수업, 근무시간, 약속시간 등 다른 모든 이들과 똑같이 움직여야 되니까요. 반면 수많은 관광객이 바글거리는 곳은 비와 눈이 내려도 자연스럽게 아무 때나 쪽잠을 잘 공간과 동지가 있어서 좋아요.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어렴풋한 상태를 비몽사몽(非夢似夢)이라고 하죠. 발병 이후 언제나 비몽사몽인 우리의 여행은 늘 꿈과 섞여 있답니다. 에펠탑 앞의 풀밭에 누워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만났고, 보라카이 해변의 비치파라솔 아래 썬베드에서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전쟁에 참여한답니다. 런던 공원의 넓은 잔디밭 위에서는 한국에 있는 엄마와 대화도 해요. 비행기 같은 이동수단을 길게 타고 갈 때는 기억도 못 할 만큼 계속 꿈을 꾸고요. 아주 큰 박물관에서도 전시관 두 개정도 보다 몽롱한 몸을 이끌고 바닥에 앉아 영상을 보는 특별 전시실로 들어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외래어를 자장가 삼아서 눈을 붙이고 나온답니다.  


기면증이 있는 사람의 몸은 우주여행이나 시간여행 같은 프로젝트에 제격일 것 같지 않나요? 정상생활을 하기 힘든 컨디션은 비정상적인 스케줄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잖아요.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이 사람이 나와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는 것 맞나 싶은 때가 있을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 1:1로 대화하다가도 잠이 들어버리니까요. 그렇게 잠만 자면서 아깝게 무슨 여행이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본성 그대로 비몽사몽 하면서 아무때나 맘 놓고 잘 수 있는 여행을 사랑한답니다. 특히 목적지로 가는 과정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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