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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Mar 01. 2019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주인은 자고 자고 또 잔다.

 "나는 고양이라 한다. 아직 이름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고양이 중에 잘생긴 편은 아니다. 키가 별로 큰 편도 아니고, 털 색깔도 좋지 않고, 얼굴도 그다지 잘 생기지 않아서 다른 고양이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겸손을 모른다. 원래 인간들은 자기 자신만 믿기 때문에 모두 오만하다. 좀 더 인간보다 강한 자가 나와서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앞으로 어디까지 오만해질지 알 수 없다. 인간보다 좀 더 잘난 내가 세상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저 여자는 주인인데 계속 잔다. 고양이인 내가 보통 12~16시간을 자는데 주인은 나보다 더 자는 듯싶다. 주인이 제 몸 상태는 모르고 일만 하던 때는 나에게 밥과 물만 줄 뿐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주인 근처에 잘 안 갔다.


주인은 가스불을 켜놓고 소파에 앉아있다가도 잠에 빠진다. 뚝배기에 된장찌개가 끓어올라 달그락 거리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내가 2012년에 잠을 깨워주는 개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으니 망정이다. 연기가 뚝배기를 부술 듯이 피어오르고 탄내가 나기 시작하는데도 깰 생각을 안 한다. 주인의 발가락을 살짝 물고 다리를 툭툭 쳤더니 그제야 일어난다. 눈을 뜨고도 불 끌 생각을 안 해서 내가 부엌으로 가며 야옹거리니 그제야 후닥닥 가스불 앞으로 뛰어온다. 인간이란...


아닉을 깨우는 기면증 환자 도우미견 이데픽스. 가스가 켜져 있거나 대중교통에서 주인이 잠들면 30분 넘게도 꾸준히, 천천히 깨우도록 훈련받았다. 출처: 영국 DAILY MAIL


주인은 원래 잠이 많았다. 이 집에서 함께 산지 10년이 다 돼간다. 회사에 다닐 때는 휴일에는 죽은 것처럼 잠만 잤다. 저렇게 눈도 못 뜨는 애가 일은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고양이인 내 눈에는 주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힘들어 보였다.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 주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태생이 달랐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주인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다. 매 순간 쏟아지는 잠을 쫓으려 허벅지가 멍들게 꼬집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단순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울 때는 죽어라 하고 운다. 사람들이란 욕심이 많고 오만해서 제 몸이 고장 나도록 쓸 데 없는 일에 몰두한다. 내가 백 년 넘게 인간 세상을 보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점은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라는 것을 위해 무엇이든 참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다. 뭐든지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경험해 둬야 한다. 죽고 나서 '아, 안타깝다'하고 무덤 속에서 억울해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를 보면서 팔자가 저 정도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아등바등하라고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니니까 좋아 보이면 그렇게 하면 될 일이다. 감당도 하지 못할 만큼 멋대로 일을 만들어 놓고 괴롭다 힘들다 투덜거리는 것은 제 손으로 아궁이에 불을 활활 때면서 덥다고 야단하는 격이다. 인간은 한마디로 일부러 고통을 만드는 동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인처럼 잠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제 몸의 상태에 맞춰 생활을 조절하면 될 일이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은 몸에 크고 작은 병이 있었다. 치료를 받는 것도 좋겠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자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주인은 요즘 들어 자기 몸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내가 봤던 인간들 중 그나마 현명한 방향을 택한 것 같다.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 이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답이 없다. 보아하니 여기는 아프거나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일 하기 녹록지 않은 곳 같다. 주인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쫓겨나면 길에서 방황할 게 뻔하다. 그러다 결국은 길에서 죽을 것이다. 잠을 깨워주는 개를 훈련시키는 영국은 주인같이 잠을 깨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중교통을 공짜로 탈 수 있게 해 주고 집도 준다던데. 주인도 나처럼 좋은 집에 태어났으면 좀 더 편했을 텐데 불쌍하다.



주인은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기를 남의 두 배나 하는 대신 그 어느 것이든 오래 지속하는 일이 없다. 좋게 말하면 집착이 없고 마음이 잘 바뀌는 거겠지만, 속되게 말하면 속이 깊지 못하고 얄팍하며 콧대만 세고 떼쓰는 아이 같다. 그런 주인이 본인의 몸을 잘 알고 타고난 기질을 찾아가는 것 같아 요즘은 마음이 놓인다. 같이 15시간을 잠만 자도 주인은 나처럼 현명하질 못해 밥벌이는 할는지 걱정이지만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았으니 앞으로도 굶지는 않을 테다.


주인처럼 아픈 사람들을 여기서는 무능하다고 하나보다. 지금 세상에서 유능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거짓말을 해서 남을 등쳐먹는 일과 선수를 쳐서 남의 눈깔을 빼거나 허세를 부려 남을 위협하거나 올가미를 쳐서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무능한 것이 꼭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유능한 듯싶었으나 무능한 주인은 이제야 두 발 뻗고 제대로 잠을 잔다. 지금까지 몰랐던 스스로를 찾는 시간이 인간들에게는 꼭 필요하다. 남의 도움으로 나를 알 수 있다면 쇠고기를 남에게 먹이고 질긴지 부드러운지를 내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 말고도 모든 사람은 다 아픈 구석이 있으니 본인의 몸과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인간들이여, 오늘도 허리를 곧게 펴고 우아하게 당신만의 하루를 즐기시게나. 그리고 하루쯤은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마음껏 주무시게. 우리들처럼.





먹던 된장찌개를 데워 먹으려고 가스불에 올려놓고 잠이 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양이가 저를 깨우러 왔습니다. 발가락이 따끔해서 눈을 떴더니, 평소에는 내지 않는 야옹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부엌으로 뛰어갔다 쇼파로 다시 오길 반복했습니다. 마치 어서 따라오라는 듯이 말이에요. 원래 제가 불러도 못 본 체하고 안아주면 도망가는 고양이 선생님인데...

첫 문장은 정말 유명한 도입부죠. 제가 좋아하는 첫 문장, 글의 많은 표현과 고양이의 눈으로 주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서술 방식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차용했습니다. 1905년, 그러니까 100년도 더 전에 나온 소설인데도 사람들의 모습과 내면은 지금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고양이 선생님 눈에는 인간이 우습고 귀여워 보였나 봐요.



- 기면증 주인을 깨우는 강아지 기사: The amazing alarm-clock dog who helps narcoleptic owner live a normal life by waking her several times a day, 2012.12.26, Daily 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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