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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04. 2019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없다.

대학교

- 탁탁.


내 무릎을 가볍게 치는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미안해, 오늘은 나 먼저 내릴게. 조심히 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던 남자 친구였다.


"알았어..."


반쯤 감은 눈으로 대충 대답을 하고 다시 스르륵 눈꺼풀을 닫고 꿈나라로 향했다.



서울 외곽에 살아서 대학교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통학했다.


버스를 타면 아침에 출발할 때와 밤에 집에 오면서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꽂고 꿀잠을 잤다. 시험기간 잠이 부족할 땐 출퇴근 시간 지옥철에 낑겨 서서도 눈을 감고 쪽잠을 잘 수 있었다.


특히 겨울이면 따끈한 지하철 의자와 버스의 히터 온기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대중교통에서 알람을 맞추고 조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내릴 때쯤 되면 번쩍 눈을 떴다. 물론 자주 한 두 정거장 지나쳐 깨 되돌아가고 버스와 지하철 종점을 몇 차례 가긴 했지만.



...


"아가씨, 일어나세요. 종점입니다."


눈을 뜨니 버스의 빨간 숫자 전자시계는 밤 11시 반을 지났고 넓고 깜깜한 버스 차고지였다.


이런. 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는데 배터리가 없어 꺼져있다.


"기사님... 죄송한데요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배터리가 없어서..."

기사님의 전화를 빌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왜 전화를 안 받니! 걱정했잖아. 또 정거장 지나쳤니? 니 남자 친구는 꾸벅거리는 너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며?"


신호음이 한 번 채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는 엄마. 남자 친구와 통화를 했나 보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버스 차고지 위치를 엄마에게 알렸다.



...


다음날, CC인 남자 친구를 아침 수업에서 만났다.


남자 친구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나는 수업에 집중을 못했고 여러 생각을 했다.


캠퍼스 커플이라 거의 모든 수업을 함께 듣고, 남자 친구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남자 친구는 반반한 얼굴에 글도 잘 써서 SNS의 인기인이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 친구를 옆에 두고 나는 정말 많이 잤다.


훈훈한 남자 친구 옆에 앉아 수업시간에는 졸고, 도서관에서는 엎드려 잤으며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늘 그의 어깨에 기대서... 잤다. 카페에서 대화를 하다가도 너무 졸려서 잠깐만 눈 좀 붙이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나의 매력이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장난스럽게

"내가 너무 많이 자서 보기 싫어어?"하고 어색하게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내가 지루해?"

한참있다 남자 친구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졸려서 잠깐씩 자는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정적이 흐르고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잠이 많은 건 괜찮아. 어제 먼저 내려서 미안해. 근데 너는 나를 만나면 계속 잠만 자잖아...."


이 말을 듣는 나는 웃음이 나오는데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너무 창피해서 귀까지 빨개졌지만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에게 관심이 없고 지루해서 잠만 자는 나에게 상처 받은 건 아닌 것 같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정도의 결론을 내렸고 남자 친구와 나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어느 때처럼 나는 '잘 자는 나, 머리만 닿으면 3초 만에 잠에 빠지는' 내가 부끄럽지 않았다. 당연히 문제라고도 생각 안 했다.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나무늘보와 잠만보처럼 잠이 많은 건 나의 특성이자 매력 포인트라고까지 생각했다.



그 후로 문득 강의실 맨 앞에 앉아서 책상에 머리를 박을 듯이 거의 매교시 조는 내 모습이 깬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해주던 전 남자 친구의 차가운 표정이 생각났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되지 뭐...'

혼잣말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는 내 모습이 추해서 그런 건지 너무 자주 졸아서 그런 건지. 그냥 졸려서 잠깐 잠이 오는 건데, 이런 나를 남자 친구가 이해해주지 않는다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나 말고 다른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현실의 백마 탄 왕자님은 나를 구하지 않았다. 동화 속 그는 공주가 마녀의 저주에 빠져 잠들었음을 알고 있었더랬다. 나는 공주가 아니라 그런지 왕자님의 입맞춤 한 번에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도 나도 내가 기면증인 걸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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