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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Sep 04. 2023

왼뺨을 맞았으면 오른뺨도 대야지!

현실 빌런의 폭력에 맞서는 법

신의 이름까지 불러와 자신의 잘못을 옳은 일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왼뺨을 맞았으면 오른뺨도 대란 말이야! 그게 진정한 사랑이야! 그래야 천국가지!!"


말문이 막혔습니다. 뻔뻔해야 가만히 있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건 알았지만 직접 당해보니 타격이 컸습니다. 천둥 같은 데시벨의 고함소리에 저는 한 손가락으로 밀면 가루가 돼 부서질 조각상이 됐습니다. 혀 끝부터 발톱까지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는 별 일도 아닌 일 또는 잘못은 본인이 해놓고 이를 수습하고 바로잡으려는 사람에게 윽박지르며 책임을 전가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본인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 밑의 근육이 파르르 떨릴 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을 멈추고 쳐다볼 만큼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유튜브 영상이라도 되는 건지 머릿속에서 UHD화질로 시도 때도 없이 생생하게 재생됩니다. 나이 70이 다 된 그의 오른쪽 눈 밑으로 불룩 튀어나온 주름진 눈 근육이 파리 날개처럼 파닥거릴 때,  차선 건너편 인도를 걷던 파란 반팔티를 입은 행인이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 발을 멈추던 순간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마트 봉지도 그려집니다.


본인의 잘못이 드러난 순간, 빌런은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뜬금없는 분노와 고함을 쏟아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재빨리 없애버리려는 수작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놀라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부모도 아닌 사람이 저의 명의를 도용해 돈을 빌리려던 것을 제가 알게 돼 무슨 일이냐고 묻고 앞으로는 그런 일 없게 해 달라는 제 말에 천국을 들먹이며 말없이 후드러 맞는 게 사랑이라며 소리를 친 겁니다. 창피함도 없이 종교까지 가져와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무고한 사람의 뺨을 갑자기 치더니 다른 쪽 뺨도 대라는 논리는 어디서 왔을까요?


대로변에서 무차별 폭언을 당한 후 계속해서 그의 고함소리가 머릿골을 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니 대체 왜 예수는 저런 말을 해가지고 빌런들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게 만든 걸까'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보통 맞는 사람은 약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리적인 힘의 약자, 사회적 계급과 권력의 을인 경우요. 약자는 때리는 사람이 되기 힘들죠. 힘없는 사람에게 인간 샌드백이 되는 게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한 대 맞고도 내 왼뺨을 내주라는 말에 반박할만할 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한 젊은 학자의 해석을 보고서야 다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저 말을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상을 알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왼손을 불결한 손으로 여겨 대변을 닦는 등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데만 썼다고 합니다.


자, 본인 눈앞에 가만히 있는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오른쪽 뺨을 치려고 해 보세요.


오른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오른쪽 얼굴을 칠 땐, 손바닥으로 치는 게 불가능합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태복음 5:38)


당시 상대방에게 가장 큰 굴욕감을 주는 방법은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손등으로 치는 게 주먹으로 사람을 때렸을 때보다 벌금이 100배 더 했다고 하니 당시 사법체계에 기록될 만큼 굉장한 모욕이었어요. 때문에 손바닥으로 치는 행위는 같은 계급끼리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나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은 마음껏 손등으로 후려쳤다고 합니다. 잘못도 없이, 또는 잘못을 했더라도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가족 앞에서 손등으로 맞는 모욕을 당해야 했던 겁니다. 통증보다 정신적 고통이 컸겠네요. '손등으로 뺨치기'는 종과 하인이 분명한 당시의 계급체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일상의 폭력이었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울분을 속으로 삼키다 화병이 날 지경인 사람들에게 예수가 말합니다. 왼쪽 뺨 마저 돌려 대라고.


손등으로 오른뺨을 맞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고, 가해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다른 쪽 얼굴을 내미는 겁니다. 자, 왼쪽 얼굴을 치려면 오른손 바닥 또는 왼 손등으로 쳐야 하죠. 여기서 가해자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손바닥으로 치자니 내가 학대하고 때린 사람을 나와 같은 계급으로 인정해 주는 꼴이 되고, 왼 손을 쓰자니 변 처리등에만 쓰라는 당시 사회 불문율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길에서 고함을 질러댄 리얼라이프 빌런은 심지어 본인 자식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나서도 한쪽 얼굴을 맞고 다른 쪽 얼굴을 내미는 것이 부모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더는 빌런이 성경 구절을 원래 의미도 모르고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는 데 쓰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자식도 아닌 저의 이름을 팔아 돈을 빌리려고 했던 그에게, 본인의 잘못 앞에 사과는커녕 무논리로 오래된 경전의 구절을 가져와 고함을 쳤던 그에게 차분히 오른뺨, 왼뺨 드립의 진실을 설명해 줬습니다. 그가 언제 분노발작을 일으킬지 몰라 겁이 나 떨면서 이야기했고, 그가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말을 꺼냈습니다. 집에서 몇 번을 연습한 후에요. 당당한 목소리로 눈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더니 적어도 몇 달간은 그가 고장 난 확성기처럼 왼뺨을 대라고 소리쳐대는 걸 안 들어도 됐답니다.


폭력 없이 가장 현명하고 정확한 저항을 하라는 의미의 구절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해당 구절 외 전체 문맥도 궁금해졌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마태복음 5:39-42


마지막 구절 역시, 당시 로마법상 로마 병사는 유대인에게 자신의 군장을 지는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길을 가다 갑자기 자기 갑옷이나 무기가 무거우면 지나가던 유대인을 불러 이것 좀 들고 따라오라고 한 겁니다. 하지만 법이 보장하는 강제노역의 범위는 5리, 즉 약 1.9km라고 합니다. 5리보다 더 갔을 경우 로마 병사는 처벌을 받을 수 있었죠. 10리까지 들어주겠다는 말의 의미는 ‘부당하게 일을 시킨 네 놈에게 고소미를 먹여주겠다!‘ 였던 거죠. 강제 노역을 당한 사람의 예상치 못한 의연함과 보통때와는 다른 반응에 로마병사는 제발 짐을 내려놓으라고 안 그러면 나 처벌받는다고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역시 문자 그대로가 아닌 글이 쓰였을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면밀히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악인들이 가스라이팅에나 쓸 만큼 바보같이 당하고 살라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상상을 해보니 죄 없는 나를 때린 가족이나 상관에게 말없이 '어이, 치려면 사람답게 제대로 대접하면서 쳐보시오.'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맞서고, 내 속옷을 가져가는 사람을 붙잡고 "가져가려면 겉옷까지 가져가게."라며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무리한 부탁을 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나는 법을 모르는 바보가 아님을 제대로 알려주는 행동 지침이었어요. 캬,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일상 속에서 매일 치밀하게 가족 같은 사림들을 괴롭히는 현실 빌런이 당황해서 어버버 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통쾌하네요. 최근 우리가 '맑은 눈의 광인'이라고 부르는 눈 똑바로 뜨고 조곤조곤 옳은 소리, 할 말 끝까지 다 하는 캐릭터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단순한 말대꾸가 아닌, 빌런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더 이상 무고한 피해자를 만만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비법들에 감탄이 나왔습니다.


물론, 가장 가까이서 나와 호흡하던 현실 빌런의 예상치 못한 가해를 당할 땐 아무런 생각이 안 나고 머리가 하얘질 경우가 많습니다. 당당한 가해자 앞에서 피해자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아무 잘못이 없이 당하기만 한 사람이 오히려 “미안하다, 죄송하다”며 사과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꽤나 많죠. 누군가를 해쳐본 적 없는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맞는 상황에서 어떻게 의연하고 지혜롭게 대처할까를 고민하는 게 때로는 최선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이나 직장 상사 등 연을 쉽게 끊기 힘든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지속적으로 가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간디의 비폭력 저항도 마틴 루터킹의 ‘난 꿈이 있습니다’ 연설도 부당한 대우를 향해 강하고 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사랑과 희생의 아이콘 예수님 마저도 강자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저항을 하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위안을 줬습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 내 가족일지라도,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일지라도 포기하기보다는 끊임없이 그릇된 행동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게 사랑이겠죠.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개선 가능성이 없는 현실 빌런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현명한 비폭력 저항 방식에 대한 고민의 시간은 저에게 회복제가 됐습니다. 그들의 무논리와 폭력적인 행동에 아무것도 못 하고 상처입을 때면 한 번쯤은 다음번에는 이런 방식을 써봐야지 연습하면서 말이에요. 현실빌런과의 장기전을 치르려면 고차원적 싸움을 연구해야 합니다.


* 심각한 가정 폭력이나 참을 수 없는 심리적 괴롭힘에는 하루라도 빨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최선임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리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랍니다.




* 참고도서: 월터 윙크 <예수와 비폭력 저항>


* 번외: 최근 미국에서 뺨 때리기 시합(Slap fighting)이 격투기처럼 스포츠 종목이 됐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심판 앞에서 두 선수가 마주 보고 서서 정직하게 풀 스윙으로 싸대기를 번갈아 주고받습니다. 휘청거리거나 쓰러지면 패하는 겁니다. 이거야 말로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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