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초록색을 고르셨나요? 초록색의 종류만 해도 이렇게나 많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초록색이 남에게는 연두색일 수도, 형광녹색일 수도 있어요.
'스펙트럼'은 '정도의 차이' 즉 무언가가 포함된 양을 강도 분포로 나타낸 것입니다. 칼로 무 자르듯이 기다, 아니다로 판단하는 게 아니고 범주 안에서 농도의 차이를 본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현실에서 빌런에게 당했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내가 빌런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나쁜 행동인지 알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고한 타인을 괴롭혔거나 아니면 내 행동이 빌런인지 몰랐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그렇다면 '빌런'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스펙트럼의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심각한 수준의 빌런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마음에 실수로 작은 생채기를 낼 정도의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래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답니다. 때로는 내가 그런 의도로 한 행동이 아니지만 상처받는 사람이 생겨요. 특히나 명절에는 적게는 2대, 많게는 4대손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모이다 보면 여기저기서 빌런의 출몰이 속보로 보고됩니다. '[속보] 7세 김 00 삼촌 피규어 두 동강 내' 등 애교(?) 수준으로 끝낼 수 있는 행동도 있지만, 명절이 넌덜머리 나게 싫어질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되는 경우도 있죠.
출처: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수능을 앞둔 조카에게 "이번 모의고사 몇 등급이니?" 대학생 조카에게는 "너네과 취업률이 어떻게 되니? 차라리 기술을 배워", 결혼한 부부에게는 "외동은 외롭다던데 둘째는 언제 낳아?"라는 질문은 모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경계를 침범당했다고 느끼는 질문들입니다. "살 빼면 예쁘겠네", "좀 꾸미고 다녀봐", "먹고 살 좀 쩌라", "피부가 푸석하네" 등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자리피하기, 웃어 넘기기, 거짓말로 대충 답하기, 역으로 불편한 질문하기 등 여러 가지 대처법들이 있지만 그래도 찜찜한 기분이 며칠 가기도 하죠. 혹시 나쁜 의도도 없고 그저 궁금해서 그리고 진심으로 아껴서 하는 질문인데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게 예민하다고 느껴지시나요.
'초록색'하나도 사람마다 떠올리는 색깔이 다 다르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초록색이 초록색이 아닐 수도 있고, 나에게는 초록색이 아닌 것도 누군가에게는 초록색이랍니다. 반응과 감정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누군가의 예민한 부분을 건들지 않도록 스스로가 주의하는 게 필요해요.
오늘은 나 스스로가 추석 빌런이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알아봅시다.
1.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답니다.
세상의 모든 평화를 담고 있는 신생아의 티 없는 얼굴을 보면 한껏 볼을 비비고 입술을 맞추고 싶어 집니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아빠도 아가의 얼굴에 뽀뽀를 안 하는 걸 아시나요? 사람의 입은 변기통보다 많은 세균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양치를 열심히 해도 '충치균'은 사라지지 않는데요. 순백의 아기 얼굴엔 아직 충치균이 없는데, 입맞춤 등으로 신생아에게 너무 이른 시기에 충치균이 옮으면 아이 평생의 구강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해요.
유튜브를 보는 조카에게, 게임을 하는 손주에게 스마트폰 너무 많이 보면 안 좋다고 훈계하는 행위도 그래요. 돌도 안 된 아기가 태블릿 PC사용법을 알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코딩을 공부하는 시대입니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아날로그 방식의 발달 교육도 좋지만, 지금 그리고 미래의 사회에서 필요한 능력은 우리 때와는 다르다는 걸 받아들여야 해요.
이처럼 여러 연구결과들이 나오면서 과거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드러나고 이에 맞춰 사람들의 행동도 변해요. 기성세대를 무시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니 나보다 어린 사람들의 말도 잘 들어주세요. "너네 아기 때 다 뽀뽀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어."라는 식으로 귀를 닫고 아이에게 그래도 뽀뽀를 보란 듯이 하시는 건, 가족을 상대로 전투개시를 하는 거랍니다.
2. '맥락' 두 글자만 기억하세요.
연봉이 오른 이야기, 결혼생활이 정말 행복하다는 이야기, 새로 태어난 아이가 너무 예쁘다는 이야기.
축하받아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같은 밥상에 앉은 가족 중 갑자기 해고된 사람이 있거나, 배우자가 외도를 한 사람 또는 반복되는 유산을 한 사람이 있다면요? 무슨 상관이냐고 하시면 안 됩니다(...) 나의 행복이 때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답니다. 특히나 가족이라면 더욱 서로의 사정과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알아야죠.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아서 몰랐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세심하게 마음을 쓸 필요가 있어요. 위로와 공감 그리고 해결책은 못 주지만 적어도 상처는 주면 안 되잖아요.
앞뒤 상황을 잘 생각하고 혹시나 내 말이 누군가의 아픔을 건드리지는 않을지 한 번만 생각해 봅시다. 나, 내 부모님, 내 자식과 비슷한 또래의 가족을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하기도 하겠지만 둘이 있을 때 요즘 힘든 일은 없는지 슬쩍 물어보고 가만히 들어준다면 어떨까요?
3. 내가 해결을 도울 수 있는 문제인지 생각해 봅시다.
"딸이 있어야 안 외롭지", "아들이 있어야 든든하지"등의 말은 위험해요.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식을 왜 더 안 낳느냐는 말로 들려요. 한 아이를 성인까지 기르는 데 최소 2억 이상의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2억을 지원해 줄 거 아니면 결혼, 출산, 육아, 취업 등 인생의 굵직한 변화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삼가는 게 요즘의 예의가 됐답니다.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지적하기 전에 내가 직접적인 해결책까지 마련하고 지원할 의사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는 게 필요합니다.
4. 내가 두 얼굴이 아닌지 말하기 2초 전 마음의 거울을 보세요.
보는 눈이 없을 때는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아내, 어머니 또는 자녀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다가 가족들이 온 후에는 갑자기 음식 준비를 돕는다던지. 며느리에게 요리와 설거지를 시키다가 남편이 들어오니 갑자기 며느리에게 웃으며 "일 하지 말라니까 내가 다 했잖아~"라고 하는 행동 같은 거 말이에요.
잘못된 행동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상황에 따라 행동을 바꾸는 건, 일하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랍니다. 당하는 사람이 바보라서 그때그때 당신도 일 하라고 말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뭔가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생각하면서 묵묵히 당신의 몫까지 일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아무 일도 안 할 거면 끝까지 하지 마세요.
두 가지 다른 행동을 동시에 하는 건 임기응변에 강하거나 현명한 게 아닌 비열한 겁니다. 수십 년 간 명절 준비를 해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거나, 귀찮아서 일을 하기 싫다면 대놓고 하지 않는 대신 "나 대신 일해줘서 고맙다.", "함께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모두의 앞에서 말해주세요. 아니면 차라리 전과 떡 등 음식은 미리 시장 등에서 사서 해결하고 설거지 등 정리는 재미있는 게임으로 당번을 정하자고 이야기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의 몫까지 일 한 사람의 힘들었던 몸이 사르르 녹을 거예요.
5. 종교, 정치, 성적 지향 관련 주제는 '인정'할 마음이 없으면 꺼내지 마세요.
당신이 믿는 가치가 절대 진리라서 주말마다 수입의 10%를 바치고, 매일 기도하는 거 압니다.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임을 받아들였겠죠. 하지만 타인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종교는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랍니다. 인생 전체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통째로 바꿔야 하는 문제랍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든, 다음생에 모기로 환생하든, 영원히 이승을 떠돌든 몰라서 안 믿는 게 아니에요.
말로 전도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와,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정도로 괜찮은 사람이 되면 자연히 당신의 신념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거예요.
정치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정치가 원래 "나의 이익을 지켜줄 수 있는 집단에게 힘을 모아주는 것"이잖아요. 내가 지지하는 당이나 정치인의 신념은 그저 이해집단을 대표하는 말일 뿐이에요. 특정 정당의 행보에 대해 비판하고 건전하게 토론하는 일이 어려운 건 사실이에요. 유명한 평론가나 정치학자들도 100분 토론장에서 목에 핏대를 올리며 싸우기도 하니까요. 가장 큰 문제는 지역감정, 세대갈등, 빈부격차를 무기처럼 이용해 사람들을 갈라치기하는 기성 정치권의 논리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의견을 궁금해하고 듣고, 인정하는 정도에서 끝내야지 한 가지 쟁점에 대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마세요. 반대되는 의견을 두 번 듣고, 출처가 정확한 자료들을 근거로 차분히 한 번 반박하는 건 어떨까요?
마지막으로 성적 지향 관련 주제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성소수자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하거나 혐오스럽다는 말을 하지 말아 주세요. 게이,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동성애자, 레즈비언, 성전환 수술 등은 질병이나 정신 질환이 아니에요. 성적 지향 관련 주제로 대화를 할 땐 '사례', '현상'등을 이야기하는 건 좋지만 무조건 옹호를 강요하거나 무조건 비판하는 것 모두 옳지 않아요.
6. 말 끊지 말아요.
한 사람이 5분 이상 혼자 말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봐요. 의외로 내가 상대방의 말을 끊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맞장구'와 '말을 끊는 것'은 엄연히 다르답니다. 추임새를 넣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말아 주세요. 누군가를 공격하는 내용 등 부적절한 말일 경우에만 끊어도 괜찮은 게 말이에요.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끝까지 들어주는 게 힘들지만 그래도 1년에 몇 번 안 보는 가족들이잖아요.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봐요.
팔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경계를 각자가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빌런도 줄어들겠죠? 나의 행동 역시 농도, 즉 스펙트럼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옅더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 주세요.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면서 편안한 추석 보내시길 바라요!
* 생활 속에서 나의 경계를 침범하고 상처 주는 빌런들을 제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추석 때 빌런을 만나시거나, 상처받았는데 말할 곳이 필요하시면 happyloser.77p@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참고) 소방청은 교통사고와 가스사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추석빌런을 조심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