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당신을 때린다면? 멀쩡히 달리고 있는데 냅다 들이박는 차가 있다면? 하지 말라고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고 블랙박스와 cctv를 열어보겠죠. 갑자기 당신을 때리거나 차를 들이받은 사람이 당신의 엄마, 연인, 직장상사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목격자와 객관적인 증거도 없다면요.
먼저 그들에게 물어볼 겁니다. 대체 왜 때렸는지, 왜 내 차를 갑자기 와서 박았는지. 그들은 기억이 안 난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왜 그렇게 예민하냐고 대답합니다. 심지어 너를 생각하고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합니다. 억울하고 속이 터지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무슨 사정이 있겠지, 또는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나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척 또는 직장 동료랑 밥을 먹는데 이러는 겁니다. "진짜 너가 엄마(또는 상사) 차 들이받고 튀었어?" 심지어 보험사에 제가 사고를 냈다고 신고하면서 큰 목소리로 모든 상황을 거짓으로 당당하게 설명까지 했데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문제가 해결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의 기분이 안 좋거나 일진이 사나운 날 갑자기 뺨을 치고는 다음날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며 세상 따뜻하게 안아줍니다. 상처받은 마음에 전화나 연락을 피하면 회사 앞까지 찾아와 왜 나랑 이야기 안 하냐고 울면서 말합니다. 당신이 한 일을 기억도 못하냐고 물으면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합니다. 설명할 길 없이 거의 매일 예상치 못한 순간 정상치를 벗어난 폭언이나 폭행이 일어나면 점점 강도가 세지는 경계를 침범하는 행위에 어떻게 대응할지 막막해집니다.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마(또는 직장상사)와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안 좋은 시선을 보내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나 생각하는 와중에 또 갑자기 길에서 내 차를 따라와 박습니다.
게다가 내 뺨을 치고도 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엄마가 밖에서는 봉사와 희생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과연 사람들이 쉽게 내 말을 믿어줄까요? 녹음을 하거나 녹화를 해서 터뜨리는 영화 같은 결말을 수만 번 상상해도 그러질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엄마가 상처받잖아요. 그렇게 하면 엄마의 사회적 평판이 안 좋아지잖아요. 내 이름을 사칭해서 돈을 빌려가도,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소문을 내고 다녀도 엄마와 나 사이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이유는 '정확한 사실의 심판이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입니다. 법정을 가기에도 경찰서에 가기에도 애매하거나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엄마가 다칠까봐 걱정이 됩니다. 나에게 가해행위를 하는 부모님은 엄마의 엄마 즉 당신의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당신의 또 다른 자식 즉 내 형제가 집을 떠나버린 경우도 있어요. 사회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대단한 사람이지만 가족관계로 상처받은 엄마의 모습을 봐서 더욱이 나까지 나 편하자고 그녀에게 해를 입힐 수가 없어요.
듣기만 해도 고구마 백 개 드신 것 같으실거예요. 착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멍청해서 이렇게 당하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에서 인정받거나 성실하고 꾸준하게 내 일을 차분히 잘 해내는 사람도 빌런이 만드는 난리통에 엮이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려요.
그렇게 반응하니 학대당하는 거라고 하실 수도 있어요. 둘이 있는 공간에서 맞서서 싸워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도 요청해 보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은 해봤지만 해결이 안 되더라고요. 거기에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요. 바라는 건 진심 어린 사과지만, 얻을 게 있을 때만 사과할 사람이라서 마음이 담긴 사과는 없을 거라는 걸 안답니다. 나를 학대한 사람에게 매몰찬 복수나 심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해를 입을까 봐.'에요.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감정을 학습한다고 하죠. 리얼라이프 빌런들이 그래요. 마음이 아프고 공감해서가 아니라 감정마저 외워서 상황에 따라 이용할 뿐이죠. 표면적인 존중이라도 얻어내는 방법은 이들보다 힘이나 돈이 많아질 경우 또는 이들의 평판 등을 걸고 협박을 하는 쪽밖에 없습니다. 짐승에겐 짐승의 언어로 말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전문의까지 있는걸요.
멋진 주인공처럼 무술을 익혀서 시원하게 맞짱을 뜰 수 없으니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고 지키는 방법을 알아야 돼요. 리얼라이프 빌런 곁에 있으면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답니다. 작은 가해행위가 오랜 시간 누적돼 마음을 짓누르고 삶의 기쁨들을 모두 앗아가는 순간까지 이르게 돼요. 하루종일 대체 내가 당한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생각하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해 보고, 거울을 보고 할 말을 연습해 보다가 이미 지금까지 시도한 모든 것들이 좌절된 상황에서 또 무기력해져요. 그리고 이런 마음 아픈 상황이 탈모, 거식증, 폭식증, 생리불순, 손발 떨림 등 신체적 증상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기하죠? 신체적 폭력은 바로 처벌받기 쉬운데 정신적 폭력에서 비롯된 신체의 상해는 온전히 내 책임인 것만 같은 현실이요.
교통사고로 치면 100% 가해자 과실인 상황. 원인 제공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 UFO를 봤는데 믿는 사람이 없고 설명할 길도 요원한 상황보다 더 답답할 때가 많더라고요.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리얼라이프 빌런은 유형화가 가능할 만큼 선행 연구들이 꽤 이루어져 있어요.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만든 콘텐츠와 채널 그리고 모임들이 있답니다.
떠나버리면 될 걸 왜 곁에 있으면서 징징대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어요. 맞아요 우리의 선택이라 계속 정서적으로 학대당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걸요. 당신을 이해합니다. 짐승 같은 그들에게 내 팔과 다리를 내 인생과 감정을 먹이처럼 주면서 울고 있는 당신. 당해주는 사람이 있어 빌런도 있는 걸까요. 나를 때린 그 사람이 다칠까봐 걱정하는 당신이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옳아요. 자책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봐주세요.
그러다 보면 대응책도 생각날 거예요. 모든 증거를 모아 제대로 빌런을 멈추게 하는 방법도, 조용히 뒤돌아 연을 끊는 방법도, 곁에 있으면서 회색의 돌처럼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방법도 있어요. 천천히 생각하면서 가장 최적의 수를 찾아봐요. 젖먹이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고 똥오줌을 가릴 때까지 수 만번을 반복하고 가르치듯 알려줘야 타인의 에너지 흡혈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한다는 리얼라이프 빌런 곁에서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꼭 기억해 주세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지라는 시선. 누군가 너를 미워한다면 너에게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조언.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다는 통념. '리얼라이프 빌런'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미지 출처: 월드오브 워크래프트 보호막 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