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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Oct 02. 2023

내가 미친 건가?

리얼라이프 빌런의 가스라이팅

2년이나 걸렸어요. 빌런에게 이야기 좀 하자는 말을 하기까지요. 제 이름으로 공금을 쓰고 남편 직장에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고 찾아오는데도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겠거니, 용서하고 넘어가면 부끄러움을 알겠거니 했습니다. 언제까지 버티나 저를 시험이라도 하는 듯 빌런은 계속해서 경계를 넘어왔습니다. 없던 일처럼 넘어가려는데 오히려 본인이 피해자인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다니며 소문을 내고 다니더니 저희 부모님에게까지 연락해 돈을 요구하더라고요.


지난 2년 동안 빌런에게 밤낮으로 오는 연락을 받으면서 살면서 처음으로 생리가 멈추고,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도 하고 기면증이 있는 제가 잠도 못 잘 정도로 힘들었어요. 한 사람을 파괴하는 건 경찰에 신고할 수도 고소할 수도 없는 일이더라고요. 참고 참다가 빌런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저와 할 이야기가 없다며 피하더니 모두가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빌런이 갑자기 나한테 이야기하자고 했던 게 뭐냐면서 대화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 순간에도 저와 남편은, 빌런의 남편에게 빌런의 공금 횡령 그리고  회사까지 찾아오고 저희 부모님에게까지 연락한 걸 지금 알리는 게 맞을까를 고민했어요. 안 그래도 빌런과 남편은 파혼 직전이라 저 사실을 안다면 둘은 완전히 이별을 하겠구나 싶었어요. 우리는 결국 지금이 아닌 나중에 객관적 증거와 함께 빌런 남편에게 차분히 알려야겠다 결정했어요. 빌런이 제 명의로 돈을 쓴 것 등을 알리지 않는 편을 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없는 장소에서 빌런과 따로 이야기를 했답니다.


객관적인 증거를 들이밀기 전까지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다가 증거를 보고 들은 후에는 '그게 뭐 어때서 그러냐. 사랑해서 그런 거다' 라며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을 바꿉니다. 공금 횡령을 사랑해서 그런 거라니... 그러더니 빌런은 저희가 녹음을 하고 증거를 정리해 놓은 게 소름 끼친다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빌런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을 한 겁니다.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해서 제 의견을 조목조목 말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저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2년이나 시간이 흘렀다니. 빌런이 제 인생을 휘저어 놓을 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정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더라고요. 하루종일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나고 이렇게 말할까, 저렇게 말할까 생각하며 하루 종일을 보내게 될 때도 있고요. 그 시간 동안 저를 살린 건 저와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글과 영상들이었답니다.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는데도 평판이 망가지고 인생을 좀 먹히는 일이 생기는구나. 저도 당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제 인생을 통제하려고 하는 상황은 일반적인 대인관계론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쓰는 "내가 싫어하는 면을 가진 사람을 보면 거부감이 든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원인 제공을 했으니 괴롭힘을 당하는 것 아니냐.", "싫은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류의 내가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심각한 가해 행위였습니다.


이 현상을 이해하려고 여러 정보를 모으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빌런이 여러 무고한 이에게 해를 가하고 있음을 알게 됐어요. 2023년, 지난해 '가스라이팅'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습니다. 원래 가스라이팅의 의미는 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뜻했습니다. 1938년 연극 <가스등>에서 남편이 아내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던 보석을 훔치려고 매일 밤 가스등을 켜고 다락방을 뒤집니다. 아내는 점점 어두워지는 가스등을 보면서 "아무도 불을 안 켰는데 이상하다."라고 합니다. 의심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내 눈엔 전혀 어둡지 않던데', '당신이 잘못 본 것이다'라고 해요. 이런 상황이 오래 반복되면서 아내는 자존감을 잃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현실감마저 점차 옅어지다가 끝내 미쳐버립니다. 피해자가 스스로의 인지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조작에서 시작해 최근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행위 전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됐답니다.


'가스라이팅'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미국 사전 출판사 <메리웹스터>에 따르면 사이트에서 카스라이팅 검색량이 전년대비 1740% 증가했다고 합니다. 리얼라이프 빌런에게 제가 당했던 일 중 일부가 가스라이팅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후부터 책과 영상 등을 찾아봤답니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 심리 상담가부터 피해자까지 다양한 콘텐츠가 있더라고요. 신기한 점은 내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사람인 빌런들이 학원에서 가스라이팅을 배우기라도 한 건지 동일한 행동양상을 보인다는 특징이 있어요.


<가스라이팅하는 사람의 31가지 특징>

1) 사과는 한다. 그러나 조건이 붙는다. 2) 삼각관계와 이간질을 즐긴다. 3) 대놓고 아부한다. 4) 특별대우를 요구한다. 5) 약자에게 강하다. 6) 약점을 집중 공략한다. 7) 남과 비교한다. 8) 잘 나가던 시절에 집착한다. 9)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10) 딜레마에 빠뜨린다. 11) 외모에 집착한다. 12) 당신의 외모에도 집착한다. 13) 사기를 친다. 14) 공포를 조장한다. 15) 성질이 고약하다. 16) 처벌로 변화하지 않는다. 17) 공감하는 ‘척’한다. 18) 무책임하고 남을 탓한다. 19) 서서히 피를 말린다. 20)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21) 지속적으로 갈군다. 22) 그의 칭찬은 칭찬이 아니다. 23) 자신의 행동을 당신에게 투사한다. 24) 당신을 고립시킨다. 25) 플라잉몽키(날아다는 원숭이, 한 쪽말만 듣고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의 편을 드는 사람들)로 압박해 온다. 26) 사람들에게 당신이 미쳤다고 말한다. 27)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28)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한다. 29) 당신이 쓰러져 있을 때 걷어찬다. 30)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31) 미끼를 던지고 낚아챈다.

- <가스라이팅, 당신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조종하는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방법>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 이진 역, 수오서재


놀랍게도 제 삶을 흡혈하던 빌런은 위의 31가지 모두 해당했습니다. 재무팀과 빌런의 공금 횡령을 확인하고도 빌런의 평판을 생각해 공론화하지 않고 조용히 묻고 넘어가는 걸 택했고 다른 사람들은 상황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빌런은 오히려 자기는 사정이 있었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제가 재무팀에 본인의 행동을 말했다는 사실을 소문내고 다녔답니다. 본인이 잘못해 놓고 그 죄를 덮어주려 했는데 오히려 거짓말까지 하며 사실과 정반대의 소문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니. 지난 2년 동안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참 자주 했었는데, 돌아보니 저 스스로를 보호해주지 못해서 내가 나에게 미안하더라고요.


가스라이팅을 당할 때 빠져나오기란 정말 어려워요.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들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어서 과거에 당한 사건이 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또 새로운 공격을 해오거든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거리를 두는 일인데 말처럼 쉽지가 않죠. 아주 여러 번 생각을 해도 뜬금없이, 맥락 없이 상처 입는 일이 생겼다면 이제 해결책을 고민할 시간이에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당신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존감을 내려놓지는 말아요.


빌런의 행동이나 말에 배려가 없고 반복적으로 상처가 된다면 한 번 의심해 보셔요. 존중하는 관계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려 노력합니다. 상대의 걱정과 애정이 따뜻하게 느껴지죠.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다라고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고 무기력해지고 우울하게 만드는 행동을 그런 말 이후에 계속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빌런이 싫은데도 불이익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빌런의 행동이 불쾌한데도 오히려 빌런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서 참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요. 팩트 폭행을 한다면 빌런의 내면이 파괴될 걸 아시죠? 계속되는 경계 침범과 가해행위에도, 내 평판을 망가뜨리는 빌런인데도 내가 사실을 말하면 빌런이 무너질 걸 알잖아요. 하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 '나'를 손상시킨다면 힘 있게 맞서는 게 필요하답니다.


제삼자에게 빌런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신다면 이제 정말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피해사실을 제대로 정리할 때랍니다. 빌런이 너무 사건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혀왔을 땐, 신체증상으로까지 고통이 나타나지만 정작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을 글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계가 온답니다. 분명히 돌이킬 수 없이 마음이 상했고 내 평판이 망가지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때, 이제는 일보다 나 스스로를 챙길 때입니다. 말과 글로 그리고 녹음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고 전문가를 찾아가서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영원히 빌런의 에너지 공급원이 될 거예요.


빌런이 나이, 권력, 경제력, 지식, 직위 등이 아무리 높더라도 타인의 삶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해친다면 존중할 필요가 없어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가 당하는 입장이 되면 섣불리 나서기가 힘들죠. 나의 감정과 입장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특히나 더 해결책을 찾기가 힘들어요.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고, 나 하나만 참으면 조직의 모두가 행복하고 평온할 거라는 생각을 하시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리 내가 피해사실을, 진실을 알린다고 해도 과연 누가 내편을 들어줄 것이며 정의의 사도가 돼서 빌런에게 잘못했다고 말을 해줄지도 요원하죠. 분명한 건 나의 결백과 빌런의 공격사이에 놓여 고통받고 있는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빌런의 오물 같은 행동에 오염된 내 시간이에요.


지금까지 빌런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일상을 지키느라 고생하셨어요. 중요한 건 내가 떳떳한 것을 남들이 믿어주냐 보다, 빌런의 공격을 멈추고 나 스스로를 지키는 거랍니다. 맞아요. 대책 없이 빌런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쳐봤자 멈추지 않을 거 잘 알아요. 다만 이제는 '당신'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당신이 가장 편안한 상태가 무엇인지 찾아봐요. 저도 리얼라이프 빌런을 만나기 전에는 빨리 해결책을 찾거나 강하게 빌런을 저지하면 되겠지라고 쉽게 생각을 했어요. 완전한 두 얼굴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거짓말을 무기로 나의 경계를 계속해서 공격하는 빌런은 전문가들 조차 치료나 해결이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피해 상황의 원인을 본인에게 돌리는 자책은 금물입니다.


객관적인 증거를 차분히 모아서 미친 건 내가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것부터 시작해 봐요. 분명히 한 말도 안 했다고 하고 본인이 한 말을 내가 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빌런을 상대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내가 미친 걸까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빌런의 계속되는 거짓말은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잘하고 법정으로 가기엔 법을 위반한 건 아니지만 나를, 무너진 나의 내면을 다시 재건하는 데는 녹음과 일자별 빌런의 발언과 행동 정리 등 객관적인 증거가 필수랍니다.



['리얼라이프 빌런과 함께 살기'는 여러분과 함께 만드는 매거진이랍니다. 가스라이팅 등 심리적 가해행위를 일삼는 빌런에게 당하는 사람들은 범죄 피해자와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다고 해요. 피해사실을 정리해 보는 것, 내가 겪고 있는 일을 쓰고 말하는 것이 빌런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에요. happyloser.77p@gmail.com으로 여러분이 만난 리얼라이프 빌런을 알려주세요. 사연을 보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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