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도 백구도 처음입니다만]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색깔’이다.
산책을 하거나 풍경을 바라보며 멍때리는 시간을 좋아했던 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시의 색깔은 무채색 팔레트가 배경에 깔려 있다면 시골에서는 대문 밖만 나서도, 아니 손바닥만 한 마당이나 옥상 한구석에 자리 잡기만 해도 RGB 컬러가 온통 가득하다. 비가 오거나 궂은 날씨에도 최소한 CMYK의 색감은 느껴진다. 조금 탁해도 저마다 색깔이 드러난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색깔로 계절의 변화를 알게 된다. 산책이라 해봤자 논두렁 밭두렁뿐인 마을 길을 크게 한 바퀴 걷는 게 고작이지만, 두 눈은 자연의 색깔로 가득 채워진다. 철마다 자라고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과 꽃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며 온갖 새와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일부러 공원을 찾지 않고 천천히 마을 이곳저곳을 걷기만 해도 수묵화 같았던 마음은 수채화처럼 조금씩 색깔이 덧입혀진다. 심심해서, 소화가 안 돼서, 뻐근해서, 바람이 좋아서, 햇살이 눈 부셔서, 저녁노을이 예뻐서, 구름이 멋있어서, 안개가 운치 있어서, 보슬비가 내려서, 흙냄새가 짙어서, 장맛비가 그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좋아서, 하늘이 하늘색이어서 등등 산책을 나설 핑계는 차고 넘친다.
아니, 겨우 산책 정도의 일에 이유가 필요할까. 목적 없이 집 주변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큰 즐거움이다.
명제로만 각인되었지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사실을 남해에 와서야 깨달았다. 꽃 한 송이, 나뭇잎 하나, 구름 한 점, 돌멩이 하나 할 것 없이 자연은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음을. 아주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저마다 표정을 가진 자연을 충분히 들여다볼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겼기에 생김이 다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도, 사물이 이동하는 모습도,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누구나 자연 속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사는 것 아닐까. 자연의 수많은 요소와 함께 살아가려면 마음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차근히 들여다보며 얘기 나누고 싶다. 마음속에 물든 작은 색깔도 어제, 오늘, 내일이 달라지거나 조금 자라나기도 하겠지만, 매 순간 스쳐 가는 마음에 소홀하지 않으며 지내고 싶다. 똑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는 자연 속에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원하는 색깔로 살아가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 그것이 곧 자연을 대하는, 자연 속의 자신을 대하는,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 목줄을 풀어줘서 고마워! 내가 길 안내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