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할머니의 플루티스트 되기 004.
뒤늦게 플루트를 배우기 위해서는 가족에게, 나 자신에게 내세울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느닷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늦게 전에 연주가로서의 꿈을 이루겠다는 나의 의지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매력적인,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유는 없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지만 가장 그럴듯한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일단 ‘입으로 부는 악기’, 즉 취주 악기 연주는 모두 폐활량 강화에 도움이 된다. 복식 호흡을 해야 제대로 연주되는 것은 클래식 관악기뿐만 아니라 하모니카, 오카리나, 리코더 등에도 해당된다. 일정한 공기 흐름을 유지하며 연주하는 훈련 과정에 폐 기능이 강화되고 호흡 근육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 또 나이 들면서 쇠퇴하는 협응력과 소근육 발달, 손가락 민첩성 훈련도 된다.
사고 등으로 갑작스럽게 죽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망 원인은 폐렴 혹은 패혈증이다. 암 투병하던 사람도, 골반이나 대퇴부 골절상을 입은 사람도, 감기가 심해진 사람도 결국은 폐가 견디지 못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이 들면서 폐를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폐가 건강하지 못하면 혈액에 신선한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패혈증 가능성도 높아진다.
악기 배우기는 신체 기능 향상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눈으로는 악보를 보면서 호흡과 손가락 등 신체를 움직여 연주해야 하므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나이 들면서 확연히 떨어지는 집중력을 다시 훈련하는 데 악기 배우기만큼 좋은 것이 또 있으랴?
긴가민가했던 치매 예방에도 정말 도움이 되는 것같다. 나이 들면서 가장 먼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고유명사이다. 젊은 시절에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의 제목을 바로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주 유명한 표제곡의 제목들도 거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사람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정치 얘기, 종교 얘기, 자식 얘기, 재산 얘기, 몸매 얘기는 하지 말라 하니 남은 건 연예인 얘기밖에 없었는데 아뿔싸, 연예인 이름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있잖아, 그 드라마에 나오는 젊고 예쁘게 생긴 남자 배우…… 걔 이름이 뭐더라? 드라마 제목은 뭐더라?”
그런 배우가 한둘인가? 무슨 드라마라는 거야? 피차 확실한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그런데 기억 안 나면 안 나는 대로 넘어가면 되는데 자신이 꺼낸 화제가 무산되지 않도록 남의 말까지 막고 고집스럽게 미망을 헤맨다. 연예인 이름 생각하다가 친구 사이에 자칫 의 상할 일도 생긴다.
그런데 젊었을 때 접했다가 몇 십 년 동안 기억의 저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음악 관련 명칭들이 플루트 레슨을 받고부터 혀에서 저절로 굴러나온다. 제임스 골웨이, 장 피에르 랑팔 등 전설적 플루티스트의 이름은 물론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라는 어려운 이름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다. 지금은 지휘자로 유명하지만 젊은 내가 그의 내한 공연을 봤을 때 그는 소년에 가까운 청년 피아니스트였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지붕 위의 바이올린> 영화에서 직접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한 아이작 스턴. 그의 연주를 들은 후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는 내 평생 사랑하는 곡 중 하나가 되었다. 또 흔치 않은 호른 협주도 감상했고 색소폰의 대가 케니 지의 공연도 두어 번 봤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고급진 연주회에 참 많이 다녔더랬다. 국내 유수 일간지 음악 담당 기자였던 후배와 세종문화회관 직원이던 고교 동창 덕분이다. 아니, 무엇보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많던 나와 남자친구(지금의 남편)의 부지런함 덕분이다. 티켓을 구해준다고 하면 열 일을 제치고 달려갔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좋은 음악회 티켓이 생기면 우리를 떠올릴 만도 했다.
하나의 기억이 실마리처럼 떠오르니 다른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딸려 나온다. 무엇보다 제임스 골웨이와 장 피에르 랑팔이 연주하던 그 반짝이는 금제 플루트는 연주가를 지향하던 젊은 내 가슴을 어지럽히는 데 충분했다. 되살려진 기억은 이름은 물론 그들의 연주회 장면도 눈앞에 선연하게 펼쳐놓는다.
좋은 징조이다. 플루트 배우기에 집중하니 두뇌가 새롭게 자극받아 인지 기능이 향상되는 느낌이다. 뇌 세포가 활력을 되찾는 중이라 할까? 추억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뇌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공연히 삼삼오오 모여 자기 추억만 얘기하려다가 서로의 고집으로 말다툼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은 곤란하다. 그보다 악기 연주를 배우는 것이 치매 예방에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나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