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할머니의 플루티스트 되기 003.
62세 할머니가 플루티스트에 도전한다는 것을 놀라워하는 사람들도 내가 20대에 플루트를 조금 배웠다는 얘기를 들으면 “거봐, 예전에 배웠으니까 가능하지”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35년 만에 다시 만져본 플루트는 정말 생소한 악기였다. 운지(손가락의 움직임)든 뭐든 예전에 배웠던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악기를 손에 쥐면 낼 수 있는 낮은 B(나)음밖에는 기본 음계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20대에 2년 가까이 배웠다는 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 받았던 음악 교육이 플루트 배우는 데 도움되는 건 오로지 하나, 악보를 읽을 줄 안다는 점뿐이었다. 그거라도 어디냐 싶은 심정으로 기초부터 다시 제대로 배우고자 했다. 그런데 완전 쌩 기초부터 배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사라졌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면 텅잉(혀끝으로 소리를 끊어 부는 것) 같은 것이 나도 모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원래는 플루트의 헤드만 들고 바람 불어넣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헤드 구멍을 향해 바람을 불어넣는데 반은 구멍 안으로 반은 구멍 밖으로 향하게 방향성을 가지고 불어야 한다. 말이 쉽지 이런 섬세한 동작은 제대로, 잘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예전에 플루트를 쬐끔 접했던 나는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데 선생님은 그냥 소리 낼 줄 아는 걸로 간주하고 기초 연습을 뛰어넘었다.
취미반 학원 선생님은 기초를 탄탄히 한다며 수강생을 지루하게 만들면 안된다. 수강생이 입으로는 “기초부터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라고 해도 기초가 제대로 될 때까지 진도를 붙들고 있으면 다음 달에 등록 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음대 진학할 목적으로 시작하는 어린 학생이 아니고 취미로 연주하는 나이든 수강생에게는 소리를 낼 줄 알고 어떻게든 연주하면 그만이지 ‘탄탄한 기초’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23세 여름, 낙원상가 학원을 그만둔 나는 개인 레슨을 해줄 선생님을 찾았다. 그때는 플루트를 가르치는 학원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리고 퇴근 이후 늦은 시간이나 주말에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도 제약이 되었다. 토요일에도 오전 근무를 하던 시절이라 시간 맞추기가 더욱 어려웠다. 어찌어찌해서 플루트 전공하는, 음악대학 재학 중인 여학생과 만나게 되었다.
그해 나의 연봉은 520만 원이었다. 한 달 월급 20만 원에 200% 보너스. 내가 생각한 한 달 레슨비는 지금 가치로 40만 원 수준이었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런데 제시한 금액을 들은 그녀는 성난 얼굴로 말했다.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그 금액으로는 레슨 못해요.”
금액이 안 맞으면 그냥 “레슨비가 너무 적어서 못하겠어요”라고 말하고 안 하면 그만일 것을 그렇게까지 외칠 것 뭐 있었을까. 아무튼 나도 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도 없었지만 설사 레슨비를 깎아준다고 해도 그런 선생은 계속 나를 싸구려 수강생으로 볼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구인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예 음악대학 출신이 아니지만 플루트를 잘 부는 사람으로 한정하여 수소문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내가 원하던 선생님을 구할 수 있었다. 아는 동생의 교회 친구, 플루트 전공하려고 고등학교 3학년까지 준비하다가 막판에 신학교 진학으로 길을 바꾼, 목사 지망 젊은 남자였다. 그는 내가 제시한 금액이 많고 적음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공생도 아닌 자신에게 돈 내고 플루트를 배우겠다는 나를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당시 플루트 2중주에 흠뻑 빠져 있었다. 나를 2중주 파트너로 키우겠다는 생각에 그는 들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기초를 제대로 배우기보다는 플루트 2중주의 한 파트를 소화해내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교습 교재는 2중주 악보였고 레슨은 2중주 연주가 주를 이뤘다. 당시는 나도 큰 불만이 없었다. 나를 기꺼이 가르쳐주겠다는 선생님을 구했고 아무튼 플루트 연주를 즐겁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2중주는 그럴듯하고 아름답게 들렸다. 선생님이나 나나 호흡, 텅깅, 운지 등의 섬세한 훈련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나는 플루트의 기초는 탄탄하게 다지지 못한 채 연주만 열심히 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즐겁게 2년여를 보내고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안 그런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결혼하면 여자는 자기가 하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하는 나는 미련 없이 플루트 배우기를 중단했다.
악기든 운동이든 기초를 다지지 않고 냅다 뛰어나가면 처음에는 어떻게 되는 듯해도 좀 높은 단계에 이르면 한계에 맞닥뜨리고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20대에 기초를 중시하지 않고 ‘얼치기’로 배웠는데 62세의 교습도 설렁설렁이 될 위기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