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지만

도전! 할머니의 플루티스트 되기 002.

by 황인희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62세는 뭔가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기에는 많은 나이다. 갈 길은 먼데 현실적으로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100세 세대라고 하지만 지금의 노년은 건강도, 경제 활동 가능 나이도, 자신의 사고 방식조차 100세를 사는 데 맞춰져 있지 않다. 기껏해야 기대수명 80세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100세까지 연명은 할 수 있다 해도 활력 있는 삶이 몇 살에서 끝날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악기를 새로 배운다는 것은 좀처럼 쉽게 결심할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인 내가 다시 플루트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악기 연주가가 되겠다는 나의 열망이 워낙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결심을 쉽게 해준 또 한 가지 요소는 내게 ‘악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쓰던 암스트롱 플루트는 여러 해 전 조카딸에게 주고 없었지만 딸이 쓰던 야마하 초보자용 플루트를 팔아치우지 않고 간직한 건 정말 다행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딸에게 플루트를 가르친 것은 거의 30년 전 일이다. 나는 약간 누렇게 변색된 중고 악기로 시작했지만 딸에게는 야마하 새 악기를 사줬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악기를 건네며 딸을 꼬드겼다.

“플루트 부는 천사 그림 본 적 있지? 나중에 하얀 드레스도 사줄게. 드레스 입고 플루트 부는 넌 정말 천사 같이 아름다울 거야.”

예전에 내가 플루트를 조금 배웠다는 얘기에 음악학원 원장은 모녀 합주 프로그램을 꿈꿨다. 물론 나도 그때 원장의 꿈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딸의 플루트 공부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개인 레슨을 위해 선생님을 집으로도 불러봤지만 딸은 플루트 배우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취미와 소질은 거의 같은 말이다. 취미가 없으면 소질을 계발할 기회도 얻지 못한다. 결국 딸의 반짝이는 은빛 플루트는 30년 가까이 옷장 속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내 나이 62세도 저물어가는 12월, 사무실이 있는 강남역 근처 플루트 학원을 검색하여 원장과의 면담 약속을 잡았다. 우선 야마하 플루트를 보여주며 그 악기가 여전히 쓸 만한 건지 물어봤다. 악기를 새로 사야 한다면 다시 고민이 시작될 터였다.

“상태 좋고요. 심지어 이 악기가 요즘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어요. 이 악기는 ‘made in Japan’인데 요즘은 거의 인도네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 만들거든요.”

그 말을 듣고서야 플루트에 새겨진 ‘made in Japan’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횡재한 느낌이었다. 주저할 것 없이 나는 그 학원에 수강 등록을 했다. 시작했으니 이미 반은 온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걸 왜 그동안 내세까지 들먹이며 그렇게 포기하고 살았을까?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는 그렇다 쳐도 1년이라도 일찍 시작할 걸…….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쉽다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날 중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 하지 않던가. 아직 늦은 건 아니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젊고 예쁜 여자 선생님이었다. 물론 음악대학에서 플루트를 제대로 공부한 전공자였다. 레슨 장소는 밝고 쾌적했다.


문득 38년 전 처음 플루트를 배울 때 학원 강의실이 떠올랐다. 낙원악기상가 근처, 지저분하고 낡고 좁디 좁은 공간이었다. 선생님은 밴드마스터 출신 나이 든 남자분. 24세의 나는 그 선생님의 나이를 대략으로라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나이 든 남자분으로 기억할 뿐. 플루트를 배운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쁘고 가슴 벅찼던 나는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그땐 학원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선생님에게 한 달을 배웠을까, 석 달을 배웠을까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학원을 떠난 이유는 분명히 기억이 난다. 앙부쉬(Embouchure), 앙부쉬 때문이다. 앙부쉬는 ‘입에 대다’라는 뜻의 용어로 관악기 연주를 위한 입 모양을 말한다. 완전 초보이니 앙부쉬를 제대로 배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입술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선생님도 앙부쉬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내 입술을 열심히 들여다봤겠지. 그것도 좁고 방음 시설된 레슨실에서……


환갑이 지난 지금이라면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되랴. 잘 배우기 위한 절차이고 그 선생님이나 나나 서로에게 별다른 감정을 품은 것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24세 아가씨였다. 그 선생님과의 수업이 왜 그리 불편했든지. 아마 한 달만에 그 학원을 그만뒀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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