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교실에 서 있는 나는, 매일 배우는 사람에 가깝다.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단지 지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은 교사가 한 인간으로서 계속 나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 내가 가르치는 한 학생이 내 브런치를 찾아냈다. 동료 교사에게조차 글을 쓴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순전히 검색만으로 찾아낸 것이다. 그 학생의 능력에 놀라워할 틈도 없이, 한 편 한 편 성실하게 읽고, 코멘트까지 남겨주었다. 고맙기도 했고, 사적인 이야기까지 드러나는 글의 특성상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학생이 내게 묻기 시작했다.
“왜 다음 편을 쓰지 않는 거예요?”
“글을 쓴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어요.”
나는 그 친구를 볼 때마다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넘어가곤 했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 넘길 수는 없었다. 물론 내게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수업이 많다거나, 맡은 업무가 많다거나, 올해 내로 완성해야 할 소설이 있다든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령, 내가 학생에게 숙제를 냈는데 그 학생이 숙제를 못 한 이유를 줄줄이 설명한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
아마 망설임도 없이 변명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물며 선생이라고 불리는 이가 학생에게 변명거리를 늘어놓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서야 하겠는가?
결국 부끄럽지 않은 선생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쉬었던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이것만큼 무서운 동기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오늘은 제자로부터 동기를 얻었으니,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을 가진 ‘敎學相長’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성어는 『예기(禮記)』 의 「학기(學記)」편에 나온다.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옛날의 왕 노릇 하는 자는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통치함에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열명>에 처음부터 끝까지 배움에 전념할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비록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다. 비록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좋은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배워본 뒤에야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고, 가르친 다음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고 나서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다. 곤궁함을 안 다음에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 <열명>은 『서경(書經)』 의 「열명(說命)」편을 말함.
이 성어의 뜻은 단순히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시 가르쳐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사라는 직업은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진리를 탐구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자나 소크라테스처럼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일컬어지는 이들 역시, 가르치며 배우는 삶을 지속할 수 있었기에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학생의 질문 하나가 멈춰 있던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익숙하게 반복하던 나의 변명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학생으로부터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을 다시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
서로를 비추며 함께 자란다는 말.
교학상장(敎學相長)은 아마도 이런 순간을 두고 생겨난 말일 것이다.
敎學相長(가르칠 교, 배울 학, 서로 상, 자랄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