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이름을 정해야 한다.
이름을 정해야 로고작업도 할 수 있고 그에 맞는 메뉴 구성으로 가게의 전체적인 콘셉트도 정할 수 있다.
영희는 SNS로 도시락 업체들의 상호를 살펴보았다. 보통 두 글자의 이름에 도시락, 식탁, 테이블, 키친, 파티 등의 이름들을 붙였다. 영희도시락, 영희식탁, 영희테이블, 영희키친, 영희파티.. 내 이름은 정말 어디에 갖다 붙여놔도 올드하고 촌스러운 느낌이라며 조금 전까지 수첩에 이리저리 적어 내려 간 펜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이름에 대한 컴플레스를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스멀스멀 옛 기억이 떠올라 웃었다. 영희라니?! 그것도 김영희라니?! 아직 삼십 초반인데 엄마의 ‘영애’ 이름이 더 예쁘고 젊게 느껴질 정도다.
이름에 대한 불만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바둑이야 안녕, 선생님 안녕하세요.” 의 인사말을 배울 때 “영희야 안녕” 에서 반 아이들이 모두 영희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고 ‘우리 반에도 영희 있잖아?’ ‘영희래’ 하며 수군거렸고 웃었다. 영희는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빨개졌고 펼쳐진 국어 교과서에 얼굴을 감추게 되었다. 쉬는 시간이 되어서는 반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은 “영희야 안녕” 하며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어떤 이들은 관심이라 생각하고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영희는 어른들의 물음에 한마디도 못하는 아이였고 발표로 호명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하면 왠지 모를 두려움에 울먹울먹 우는 아이였다. 반 아이들의 관심에도 무척 힘들어했다. 국민학교 1학년, 영희는 어렸고 여렸다.
영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개명을 고민한 적이 있다. 진희, 선희, 미희, 영희. ‘희’ 자 돌림이니 희로 끝나는 이름을 몇 개를 적어봤다. 정희, 윤희, 민희, 은희, 수희, 소희 몇 개만 적어도 영희도 보다 훨씬 예쁜 이름들이 많은데 그 많고 많은 ‘희’ 돌림 중에 하필 영희라니?! 영희는 자신을 부르는 ‘영희’라는 두 글자의 소리도 싫었고 특히나 성이 합쳐진 ‘김영희’ 다섯 개의 자음과 세 개의 모이 합쳐진 소리 뿐 아니라 글씨도 싫어했다.
여자 희, 뛰어날 영. 평범하고 흔한 이름과 달리 영희는 ‘뛰어난 여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왕비라든가 지체 높은 여성에 대한 존칭 ‘임금의 딸’, ‘존귀한 왕비’를 의미하기도 한다. 뜻을 알고 나서도 이름에 대한 좋지 않은 마음은 여전했다.
서른이 되면서 영희는 자신의 이름을 조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김영희’를 살았고 이름을 바꾼다고 해도 영희는 여전히 ‘김영희’다. 어느 순간부터는 ‘영희’라는 이름이 좋아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도시락업체 이름을 영희로 쓰는 건 무리가 있다.
수아
내려놓았던 펜을 들고 ‘수아’ 두 글자를 적어보았다. ‘희’ 자 돌림 이름 이외에 예쁘다고 생각한 이름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그 이름은 수아였다. 영희가 중학생 때 본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 이름이 수아였다. 청순한 여자주인공과도 잘 어울렸던 이름이었고 꽤나 재밌게 본 드라마여서 수아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김수아’ 평범한 성인 ‘김’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마음속에 간직해 둔 이름이다.
나중에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 꼭 ‘수아’라는 이름으로 지어줘야지 다짐도 했다. 수아는 ‘김’씨 성과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면 동성동본이지만 김 씨 남자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나이 서른이 넘었고 현재 남자친구도 없다. 몇 년 안에 결혼계획은 더더군다나 없으니 아이를 낳아 이름을 짓는다는 것도 까마득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딸이라고 생각하고, 어린 시절 나라고 생각하고 돌보고 사랑해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도시락 업체의 이름을 ‘수아’로 결정했다. 수아 도시락.
영희는 집과 가까운 성북동에 작은 가게들을 알아보았고 4평의 작은 공간에 보증금 500만 원에 한 달에 30만 원으로 계약했다. 이 전에 컵밥을 파는 곳이어서 싱크대와 가스, 냉장고, 선반 등 그대로 작업장으로 쓸 수 있어 초기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로고작업은 전문 업체 여러 곳을 문의했는데 백만 원부터 천만 원까지 비용이 천차만별에다가 작업하고 싶은 회사는 사백만 원으로 생각보다 비쌌다. 디자이너와 사업자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을 발견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로고가 필요한 사업자가 정보를 제공하면 그 플랫폼 안의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시안을 받아볼 수 있다. 비용은 30만 원에서 40만 원 선으로 합리적이고 다양한 디자인 중에서 고를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게에 수리할 부분이 있어 수리하고 냉장고 에어컨 등 꼼꼼히 청소도 했다. 필요한 주방도구들도 인터넷으로 대거 주문하고 서랍과 찬장 등 필요한 것에 넣고 꽂으며 정리를 마쳤다. 간판을 달아야 하고 스티커 인쇄도 해야 해서 로고가 빨리 필요하다. 인터넷을 통해 홍보를 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니 대충 할 수 없어 늦더라도 로고 작업에 신중을 기했다. 정해진 기간을 차분히 기다리고 있는데 초반 세네 개 시안은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고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해도 아쉬운 점이 몇 가지가 보여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기간을 하루 이틀 남겨두고 열 개 넘는 시안들이 막 올라왔고 총 20개의 시안을 받아보게 되었다. 그중에서 SUA 영어 철자를 가운데 두고 도시락을 포장한 듯한 리본 모양으로 나타낸 시안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하얀 바탕에 도시락은 주황, SUA 영어 철자는 초록으로 되어있어 샐러드나 샌드위치 등의 건강한 색감이 느껴져서 마음에 들었다. 파일을 건네받아 바로 간판 작업과 스티커 인쇄 작업에 돌입했다.
며칠 뒤 간판이 도착했다. 가로 세로 50센티미터 정사각형 네모 반듯한 작지만 소중한 간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위쪽이 아닌 입구와 통창 옆 빨간 벽으로만 되어있는 외관에 나란히 설치하기로 했다. 딸깍 불도 켜지니 하양, 주황, 초록 색감들이 깨어나듯 선명해졌다.
영희는 건너편 카페의 작은 벤치에 앉아 가게 전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들어가는 입구와 통창을 하얀 커튼으로 가려 가게 안쪽이 보이지 않게 했고 건물의 빨간 벽돌과 하얀 간판이 잘 어울린다고 또 예쁘다고 생각했다.
“수아야, 우리 잘해보자!”
영희는 다시 가게 안에 들어가서 정리할 것을 마저 정리하고 집을 갈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가게 안은 불이 꺼졌고 네모 반듯 하얀 간판은 여전히 환하게 어두운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