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는 세 번째 회사도 결국 그만두었다. 올해까지만 쉬어보기로 했고 결혼하게 되든지 새로운 일을 하게 되든지, 뾰족한 수가 없으면 내년에 하던 일을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올해까지는 6개월 정도 남았다. 퇴사와 동시에 해방감으로 기뻐야 하는데 기쁘기보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조급함이 앞섰다.
영희의 직장인 루틴은 아침 7시 알람소리에 깨는 것부터 시작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한다. 로션과 선크림만 바르고 가방을 챙겨 지하철로 향한 뒤 만원 지하철 한 두 대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출입구 틈에 끼어 30분을 달려 회사에 도착하는데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은 1층 카페에서 사 온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는 일이다. 그제야 정신이 들고 눈이 뜨인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고 지하철은 어떻게 타고 왔는지 신기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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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의 백수루틴은 낮 12시에 기상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침대에 누워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잠을 깬다. 암막커튼을 걷어내니 한낮에도 깜깜했던 방안에 환하고 눈부신 빛이 쏟아진다. 햇볕이 따뜻하고 좋아서 영희는 좀 더 누워 이리저리 뒹군다. 핸드폰으로 메시지도 확인하고 날씨도 확인하고 주요 뉴스거리도 확인한다. 30분쯤 지나 그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묶으며 부엌으로 나선다.
냉장고에서 사과 반쪽과 당근 반쪽을 꺼내 믹서기에 갈아 주스 한 컵을 먼저 마시고 본격적인 아침 준비에 나선다. 플릴라이즈, 루꼴라, 라디치오로 구성된 야채 믹스 한 팩을 꺼내 샐러드접시에 담고 방울토마토 몇 개를 반으로 잘라 올린다. 아몬드 슬라이스도 한 줌 뿌려주고 유자드레싱을 올려 샐러드 준비를 마친다. 마지막으로 제빵학원에서 만들어 온 식빵을 잘라 오븐에 넣어 구워 토스트를 만든다.
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데 영희가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이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쉬며 자연히 미소도 지어진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계란프라이를 만들고 사과잼과 계핏가루도 준비한다. 따뜻한 식빵에 사과잼을 바르고 그 위에 계핏가루를 뿌린 뒤 계란프라이를 얹어 반으로 접어 바로 먹는 영희표 토스트가 완성이다. 자주 해 먹는 토스트임에도 영희는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맛있다’라는 말을 입밖에 낼 정도로 행복해한다. 토스트가 두 입 정도 남은 상황, 영희는 이어서 식빵 하나를 더 굽고 계란프라이도 후딱 만들어 두 번째 토스트도 또 만들어 먹는다. 중간중간 마시는 우유가 시원하고 고소해 토스트와 곁들여 먹고 샐러드는 마지막으로 먹으며 개운하게 한 끼 식사를 마친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숨을 크게 몇 번 쉬고는 오늘 하루 동안 해야 할 일들을 태블릿 스케줄표를 보며 간단히 정리한다. 2시부터 5시까지 제빵 수업이 있고 8시부터 9시까지는 요가수업이 있다. 오늘 제빵수업은 카스텔라 만들기다. 매일 만들어 오는 빵을 혼자 소진하기가 어려워 미희네 집에 전해주기도 하고 중학교 동창이자 유일한 동네친구 도경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서른 중반, 대부분 친구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만날 시간도 맞지 않고 공감대도 달라 자연히 소식이 뜸하게 되었는데 미혼인 도경과 영희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영희는 맥주를 좋아하고, 도경은 와인을 좋아한다는 점만 다르고 둘 다 요리를 잘하고 다양한 요리에 관심이 많고 손님을 초대해 식사하는 걸 좋아한다. 서로의 집에 번갈아 가면서 저녁식사를 하다가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도경의 집에 영희가 더 자주 가게 된다. 오늘 저녁도 도경의 집에서 먹기로 했고 제빵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만든 카스텔라를 들고 가기로 했다. 도경과 문자를 하느라 한동안 놓여있던 식탁 위 그릇들을 서둘러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라도 해봐야 접시 두 개, 컵 하나 포크하나 정도라 금방 끝났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며 집안 청소를 시작하는데 ‘노동요’를 검색해 미디엄템포의 감미로운 곡이나 리듬을 타기 좋은 곡들을 선곡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영희는 곧이어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이 방안을 둘러싼다. 행복한 듯 싱긋 웃는다. 이 또한 영희가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다.
밥 먹는 일이, 청소하는 일이 이렇게 행복해할 일인가 싶어 웃음이 나기도 하다가 하던 청소를 잠깐 멈춰서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닌데, 일상을 살고 나를 돌보는 것. 삶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이렇게 행복해할 일인지. 즐거움과 어이없음을 오가며 청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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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닐 때도 주말은 있었다. 회사 특성상 기한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몸은 쉬어도 머리는 쉬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고 심지어 주말에도 집이나 카페에서 업무 하는 날이 주를 이루었다. 아무 일정 없이 보내는 주말은 그야말로 황금 같아서 하루, 한 시간이 소중했다. 평일의 삶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쇼핑을 하거나 술모임으로 꽉 채워 보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자는 게 아까워 혼자 맥주를 마시며 새벽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주말을 쥐어짜듯 보냈다. 이렇게 폭주하는 날에는 숙취와 피곤으로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를 몸속에 부어가며 월요일을 시작했다. 악순환인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주말을 보내야 영희는 회사를 버텨낼 수 있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에야 영희는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다.
퇴사 후 하고 싶었던 일은 요리와 베이킹이다. 달콤한 디저트가 주는 즐거움이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쉽고 빠르게 기분전환이 되어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미희와 자취할 때 반찬은 대부분 영희가 만들었고 주말 특별한 요리도 영희가 담당했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미역국, 된장국, 나물반찬, 제육볶음, 김치전, 야채 전 등 영희가 만든 음식을 미희는 다 좋아했다. 그중에서 군만두와 야채 전을 제일 좋아하는데 편의점 냉동만두를 영희가 요리하면 육즙이 살이 있는 고급 중화요리로 변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냉동만두를 약불에 굽고 만두를 뒤집을 때 약간의 물을 부어 뚜껑을 닫아 삶듯이 구우면 군만두와 찐만두의 두 가지 느낌을 다 낼 수 있다며 영희가 알려준 적이 있다. 미희도 영희를 따라 몇 번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결국 영희가 차려줄 때마다 맛있게 먹는다.
야채 전은 감자, 당근, 양파를 채 썰어 밀가루 반죽으로 묻혀 손바닥만 한 크기로 부쳐내는데 아삭하고 바삭한 야채 전이 완성된다. 소스는 간장, 식초, 고춧가루의 황금비율로 신발을 찍어먹어도 맛있을 간장소스까지 내놓는다. 새로운 메뉴도 블로그나 유튜브를 보고는 똑같이 만드는데 처음 해보는 요리도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영희는 전라도 출신인 엄마의 요리를 먹고 자라 비슷하게 흉내 내보려고 하니 맛있게 되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다이어트와 운동이다. 야식과 맥주가 일상이 된 영희의 몸무게는 앞자리 수가 바뀐 지 1년이 넘어간다.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 청순한 느낌이 들다가도 작은 키에 애교 있는 성격 때문에 귀여움도 겸비한 영희는 대학 때 인기도 많았고 졸업하고도 꾸준히 연애를 쉬지 않았다. 작년에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게 처음이라며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달라진 외모 때문인지 요즘은 거울도 안 보게 되고 옷도 잘 사지 않는다. 다이어트로 20대 외모를 되찾기보다 건강과 자신감을 얻기 위해 리스트에 올렸다. 요즘 많이들 하는 운동을 적고 주변에 할만한 장소들을 검색했다. 헬스, 필라테스, 요가, 수영이 있었다. 영희는 요가를 선택했다. 대학 때 교양수업으로 들은 적이 있는데 날씨가 제법 쌀쌀해질 가을학기 일주일에 한 번 요가수업은 따뜻함이었고 쉼이었다. 어두운 조명, 은은한 향, 1인 매트에 눕거나 앉아서 시작되는 수업.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면서 긴장되었던 마음들도 풀어지는 듯했고, 한 자세에서 균형을 잡고 버텨야 하는 동작에서는 부들부들 몸이 떨리긴 했지만 전신이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송골송골 맺힌 땀, 붉게 달아오른 얼굴, 헝클어진 머리. 한 시간의 수련이 끝나갈 때쯤 불을 끄고 깜깜한 실내에서 천장을 보고 누워 심호흡을 하는 시간이다. 영희는 교수님의 그 길고 긴 문장이 귓가에 아직도 남아있다.
“편안하게 누우시고 긴장했던 모든 근육에 힘을 빼세요. 들이마시고 내쉬며 호흡에만 집중할게요......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머리를 천천히 오른쪽 왼쪽 흔들게요.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도 흔들면서 비워냅니다. 복잡한 생각들이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며 흔들게요.......... 그만. 다시 또 호흡합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목.... 어깨.... 이마.... 미간.... 눈가.... 입가.... 인식하지 못했던 작은 근육들도 호흡과 함께 편안하게 풀어냅니다.”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교수님의 말을 따라 영희의 목과 어깨, 팔과 다리에 힘이 풀어졌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남학생 코골이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도 해서 여학생들이 키득키득 웃기도 했는데 영희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이제는 쉬라며 영희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요가원은 집과 거리가 있었다. 버스로 5-6 정거장, 차로 10분 거리인데도 선택한 이유는 다른 요가원보다 새벽반부터 심야반까지 시간대가 다양했고 초보자부터 전문반까지 수준도 다양해 선택의 폭이 넓었다. 무엇보다 상담받으러 갔을 때 원장님이 차를 내주시고 같이 마시며 요가를 해본 적은 있는지, 요가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친절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이끌었고 영희의 이야기도 들으며 그에 맞는 수련을 추천해 주셨기 때문이다. 또 상담받으러 간 당일, 1회 무료수강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랜만의 수련이라 긴장했지만 짧은 파마머리와 작은 키, 눈웃음이 매력인 여자선생님이 영희에게 인사했고 선생님의 귀여움과 친근함에 영희도 같이 웃으며 어느덧 긴장이 풀렸다. 영희는 뒷자리에서 조용히 또 즐겁게 수련했다. 10명 이내 적은 인원, 원장님과 선생님 모두 마음에 들었다. 영희는 6개월을 등록했다.
6개월 등록 시 1개월 무료 등록, 12개월 등록 시 2개월 무료등록으로 영희는 내년 1월까지 등록되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카드를 건네받았지만 내년까지 이곳을 계속 나올 수 있을까? 내년 1월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멍해졌다.
수련도 중요하지만 식이섬유와 비타민 섭취도 중요하다며 요가원에서 수박파티가 한창이었다. 수련했던 사람들과 선생님, 원장님과 같이 영희도 수박을 먹었다. 수박이 정말 달고 맛있었다. 운동 후 먹는 수박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진짜로 시원하고 맛있는 수박이었다. 원장님 사비로 진행하는 일주일간의 수박파티이고 경동시장에 가서 맛도 보고 맛있는 수박으로 직접 골랐다고 했다. 학생들이 많으니 수박 값으로만 백만 원이 들었다고 했다. 여름에는 수박파티, 겨울에는 귤 파티가 있으니 겨울 귤 파티도 기대하라고 했다.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네며 영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던 원장님, 영희에게는 한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생기 있는 얼굴로 웃으며 다가와준 사랑스러운 요가 선생님, 1개월 무료등록에 달고 시원한 수박파티까지. 영희는 의외의 곳에서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힘내라며 요가원 전체가 영희를 안아주고 달래주는 것 같았다. 수박을 한입 베어서 먹는데 울컥 울음이 올라왔다. 목에 둘러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는 듯이 눈 주변을 닦았다. 코도 시큰거려 코도 닦았다. 수박은 분명 시원한데 따뜻한 수박을 먹는 것 같았다.
요가원을 나가면서 깜깜한 실내에 천장을 보고 누워 심호흡을 하는 마무리 동작은 잠시 멈춤이라는 뜻의 ‘사바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숨 쉬는 것도 잘 안 쉬어져 답답할 때가 있다. 숨을 반만 쉬고 있다는 느낌. 흔히들 말하는 ‘숨 좀 돌려라.’ ‘ 숨 좀 쉬고 싶다’의 그 숨이 정말로 안 쉬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요가시간에 누워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데 호흡기를 단 것처럼 깊은숨이 드디어 쉬어졌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영희는 그렇게 숨을 쉬러 요가를 다녔다. 집에서도 가만히 누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신다. 영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숨 쉬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거나 누워서 쉬는 호흡, 습..... 후...... 습... 후....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호흡은 그저 ‘현재’에 존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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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영희도 안다. 지난 몇 번의 이직으로 영희도 절절하게 깨닫게 된 문장이다. 3년은 버텨야지. 영희 스스로도 마지노선을 정해놓았지만 2년이 채 되지 않아 워킹홀리데이로, 인도여행으로, 이직으로 도망 다녔다. 이번에 또 퇴사를 하면서 영희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실망하기도 했다.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매번 그만두는 자신의 한계에 ‘나도 내가 싫다.’며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다가 ‘그렇지만 너무 힘들었어’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처럼 울기도 했다.
자책과 울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일주일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