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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Aug 02. 2024

아빠가 남긴 유산!(마지막 편)

우리가 찾은 또 다른 가치!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제 개학을 해서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고, 엄마는 다시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7년째. 상속재산 분할 재판이 시작된 지 5년 만에 드디어 마무리됐구나.


최종 판결문은 이미 6월 중순에 나왔지만, 아빠의 미국 가족이 항고를 할지 몰라서 엄마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지. 그런데 다행히도 안 했나 보더라. 드디어 확정 판결까지 받았거든.


확정 판결을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네가 토론토에서 오는 날이었다. 엄마는 네가 마치 기쁜 소식을 몰고 온 것만 같아서 네가 '복덩이'처럼 여겨지더라.


너를 가졌을 때, 태몽으로 예쁜 돼지꿈을 꿨다는 얘기를 했던가? 이웃집 할머니가 복스러운 하얀 돼지에 리본을 달아서 우리 집으로 데려오는 꿈이었거든. 흰 복 돼지라니! 그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엄마는 꿈을 꾸고 나서 무척 기뻤단다.





그리고 당장 알아챘지. '이건 태몽이다! 분명 딸일 거야'라고. 태몽처럼 너는 예쁜 딸로 태어났고, 네가 자라는 동안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과는 먼 생활을 했다. 모든 게 풍요로웠지.


물론 아빠도 엄마도 고급 브랜드를 선호하거나 사치하는 습관이 없었기에 겉으로 보기에 우리 생활은 그저 평범했지만 말이다.


돈 걱정 없이 살면서 미래가 보장된, 안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엄마는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당장은 몰랐다. 처음엔 그저 슬프고 불안하기만 했지.


그리고 아빠의 미국 가족이 상속재산 분할 재판을 걸어온 초기 무렵에도 사실 잘 몰랐다. 불편하긴 했지만, 당장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재판이 진행되고, 국세청에서 상속세 고지서가 날아오고 나서야 알았지.


상속세 **억!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는데, 그게 사실이라 하더구나. 아빠가 남긴 돈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지. 유산 말이다. 월급쟁이 치고는 꽤 많이 남긴 셈이지.


그러나 우리는 그 상속세를 낼 만한 돈이 없었다. 일부 돈은 미국에 있었고, 상속재산 분할 재판이 진행 중이라,  돈을 찾아올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한국에 있는 아빠의 돈조차 상속인 전원의 합의가 없으면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엄마한테 남겨진 현금 모두를 동원했지만 전액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한국 상속세 법은 야속하게도 전체 상속 금액에 대해 대표 상속자가 1순위로 상속세 전액을 내도록 되어있는 시스템이었다. 1순위는 엄마였고, 2순위는 너였지. 미국 가족은 국세청의 손이 닿지 않는 '안전지대'에 있으니 상속세를 내든 안 내든 아무 상관이 없었고.


그렇게 내지 못한 상속세에 대해 국세청의 압류 행렬이 시작됐다. 집이 압류되고, 엄마가 가진 모든 통장에 이어, 네 이름의 보험까지 우리의 경제권은 전부 국세청으로 넘어가 버렸지. 한마디로 '돈맥 경화'였다.


그게 바로 네가 대학 갈 무렵의 일이야. 그러니 엄마는 네 학비를 빌리고 생활비를 빌리고... 어이없고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더구나. 그 세월을 어떻게 말로 하나 싶다. 그때는 쌀 한 톨도 그렇게 귀하게 보이더라.


그나마 학비며 생활비를 빌려주는 친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지.


그래서 엄마는 기쁘다. 상속재산분할 재판 결과가 우리에게 유리한지 어쩐지 보다 끝났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으니까. 이제는 국세청 압류를 풀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으니 말이다.




사실 엄마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빠가 남긴 '돈'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빠가 남긴 유산!


그건 돈이 아니란다. 바로 너와 나의 인생 체험이었지. 그리고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한 것!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너와 나는 아마도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았을 거야. 너는 모든 보살핌을 받으면서 돈이 귀한지 모르면서 살았을 테고, 엄마 역시 삶에 감사하는 대신 사소한 문제들을 불평하면서 살았을지도 몰라.


아빠가 살았을 때 매번 고민하던 게, 유리창에 왜 그렇게 물때가 끼는지, 밭에 풀은 왜 그렇게 많이 자라는지 그따위 것들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아빠의 죽음과 뒤이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엄마는 삶에 감사하게 되었다. 내 이웃을 돌아보면서 내가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인지도 깨닫게 되었지.


아빠가 살아 있을 때는 모든 게 아빠 중심으로 돌아갔고, 아빠의 그늘 아래 풍족하게 살았기에 이웃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잘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지.


그런데 그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풍족하게 잘 살고 있는 동안, 누군가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는 걸 내가 비슷한 상황을 겪으면서 알게 됐다.


더불어 내 옆에 누가 있는지도 돌아보게 되었지.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들! 아빠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더구나. 나를 응원하고 힘을 북돋워주는 사람들 말이다.


엄마는 그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만 있으면 된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안다.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를.


세상은 한 사람만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더구나. 여러 인연들이 얽히고설켜서 살아가는 거지. 다만 그들 중에 누가 진짜 소중한 인연인지는 큰일을 겪어봐야 알게 되더라. 아빠의 죽음 이후 우리를 떠난 인연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돈 말이다.



돈은 많이 번다고 우리 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더구나. 움켜쥐고 싶다고 움켜쥐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돈 그릇'이 있다고 하던데, 아마 엄마도 아빠도 돈 그릇이 크지 않았나 봐. 그러니 아빠가 번 그 돈은 처음부터 '우리 돈'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니 그렇게 나갔지.


웬 '운명론'이냐고 할지 모르겠다만,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운명이라는 게 있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이나 뒤이어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운명이 아니면 뭘로 설명할까.


보통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일을 운명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그건 운명이라고 보는 게 맞다.


다만 그 운명을 나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운명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게도 하지만, 또 될 일은 되게도 하니까 말이다.


<될 일은 된다>는 마이클 싱어라는 사람이 쓴 책의 제목인데. '인생에 일어날 일은 꼭 일어난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다만 우리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저항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좀 더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더구나.


엄마는 그걸 믿기로 했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엄마 인생이 그렇게 나쁘게 흘러오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됐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신문사에 들어가 기자 생활을 하고, 그리고 아빠를 만나고 너를 낳은 것까지. 엄마의 인생은 어찌 보면 행운의 연속이었어. 물론 중간중간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그 정도 겪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



처음에는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불운'이라고 생각했다만, 그것조차 엄마에게 어떤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어.


엄마가 세상을 좀 더 알아가는 기회, 인생에서 좀 더 배울 기회, 무엇보다 엄마가 스스로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사명'이라고 하니까 좀 거창하다만,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던져진 목적이 있다고 본다. 엄마에겐 어쩌면 그게 글을 쓰는 게 아닌가 싶다.


엄마는 오래전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지만, 그 꿈은 아빠와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잠자고 있었다. 거의 잊고 지내다시피 했지. 사는 게 너무 편했으니, 글을 쓰겠다는 꿈을 더 이상 꾸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야 다시 그 꿈을 꾸게 됐다. 꿈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남은 생을 작가로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는 행복했다. 그 글 속에서 엄마는 아빠를 살려내고 아빠를 빛내고 싶다는 소망도 갖게 됐다. 아빠의 인생을 이대로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또 안타까우니 말이다.






엄마가 아빠의 죽음 이후에 발견한 가장 큰 가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알게 된 점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죽음을 이해하고 생명의 가치를 자각하면서 그 나머지는 참 사소하게 보이더구나.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하찮게 보인다'는 어떤 작가의 말처럼. 그러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


딸아,


'고통이나 시련이 우리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더라. 니체가 그랬다던가?


너도 나도, 아빠의 죽음과 그 이후의 시간을 견디면서 많이 강해지지 않았나 싶어. 우리는 인생이 갑자기 우리 뒤통수를 때려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음을 알았고, 그 넘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배웠지.


너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은 나이니, 앞으로도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을 거야. 인생이 네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


그때 일어나는 법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받아들이고, 더 중요한 일을 선택하면서 살다 보면 희망이란 녀석이 슬며시 손을 내밀기도 하는 게 인생이니 말이다.


부디 네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기 바란다.


2024년 8월 2일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오늘도 마무리 합니다. 다음 주에 <에필로그>를 쓰면서 후속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딸에게 쓰는 편지>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소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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