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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영 Mar 15. 2019

어떤 곳에 가면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이 된다

여행과 일상, 그리고 책



그해 여름 나는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을 읽고 있었다. 그 여행기의 책머리에는 ‘여행 준비물 목록’이 있었다. 차곡차곡 쓰인 준비물 가운데 ‘기차와 비행기에서 읽을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알제리 여행의 기원이 된 알베르 카뮈와 앙드레 지드의 책이 아니라면 어떤 책이었을까. 다이어리에 여행 날짜를 표시한 순간부터 여행을 함께 할 책부터 고르는 나는 그 여행에 그가 어떤 책을 가지고 갔는지 궁금해졌다.


바쁜 일정의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책을 꼭 가지고 가긴 하지만 두 권을 넘진 않는다. 그해 여름휴가에도 나는 많은 것을 보고 즐기기를 원했으나 내 여행의 동행인은 맛있는 것을 먹고 아주 느긋하게 돌아다니다가 일찍 리조트에 돌아와 수영을 하고 책을 읽다가 잠드는, 일상 같은 여행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예외적으로 다섯 권의 책을 가지고 3박 4일 휴가를 떠났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나는 풀 주변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네 명의 청년들과 해변을 향해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는 노부부를 보았다. 수영을 하는 어린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부모 옆에도 어김없이 책이 놓여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휴가에서의 책은 사람을 여유롭고 평화롭게 만드는 일종의 소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네 명의 청년들은 숙소를 떠나는 날에도 각자의 배낭을 식탁 아래 놓은 채 식사를 마치고는 떠나는 순간까지 책을 읽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청춘을 절대 낭비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느껴졌다.



여행에서 돌아와 평범하고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할 무렵, 풍경을 더하고 추억을 보태어 한결 더 넓은 세계를 갖게 된 책은 여행의 기념품이 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간 장소를 만나기도 하고, 앞으로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하기도 한다.


섬세한 시선을 가진 작가들은 내가 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을 다정하게 말해주기도 하고,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주기도 한다. 제주, 낙산, 고창, 속초, 변산반도, 그리고 일본,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쿠바까지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써서 보내온 것 같은 소설들.


그들이 들려주는 얘기를 따라 어느새 나는 내소사를 천천히 돌아보고(신경숙 ‘종소리’), 제주도의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윤대녕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타라싱 주위에서 낭가파르바트를 바라보고(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을 산책하고(구효서 ‘시계가 걸렸던 자리’) 있다. 집안에서 가만히 보내는 시간도 책만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도 있다. 책은 스쳐 지나가고 말 것들을 기꺼이 붙잡아 더욱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봉태규는 문소리에게 어떤 곳에 가면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이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해준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책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책으로 남고 싶은가, 생각해보고 있는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오래도록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책에 관해서는 나는 늘 그런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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