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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영 Apr 12. 2019

삶은 그렇게 겹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책, 또 다른 세상을 향하는 문



한동안 불면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아서 잠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잠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건 꿈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꾸는 꿈이 너무 흥미로워서, 그 꿈의 다음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해서 다시 잠을 청한 적도 있었다.


꿈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들로 가는 문이 아닐까. 그 다른 세상에는 또 하나의 내가 살고 있고, 잠이 들면 꿈을 통해 나는 그 또 다른 나를 만난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어쩔 때는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한다. 지금의 나는 그 또 다른 세상에서는 육체가 없는 영혼뿐인 존재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볼 수 있을 뿐 개입할 수는 없다.


꿈속에서 시간은 지금 나의 세상과는 다른 식으로 흐른다. 몇 분 동안에도 며칠이 지나간다. 몇 시간 동안 오직 한순간이다. 꿈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나를 만나고 온 날 나는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의 <그것은 꿈이었을까>는 정말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모호한 이야기이다. 노웨어맨이 알려준 레인 캐슬이라는 장소,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은 다리에 화상의 흉터가 있는 여자-마리아 혹은 마리암, 프라하 여행에서 만난 모델이라는 시력 이상에 문 페이스란 병에 걸린 미아와 뚱뚱한 미나도 괴상하고 모호하기 그지없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꿈 해몽을 하는 것처럼 도대체 이건 무얼 암시하는 건가,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 은희경은 이렇게 썼다.


분명 처음 가는 길인데 언젠가 와봤던 곳 같고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딘지 낯이 익고, 그래서 기억해내려다가 끝내는 포기했던 일이 있다. 꿈에서 본 걸까. 꿈은 인생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현실에서도 살고 있고 꿈에서도 살아간다. 꿈속의 나에게는 꿈이 즉 현실이므로 꿈속의 꿈이 또 존재하고 말이다. 삶은 그렇게 겹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닐까.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꾸는 일, 그 역시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나는 꿈속에서 가끔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 그리운 사람이 나는 천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천사들의 제국>에서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천사들의 제국>은 죽음 뒤에나 만날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그런 천국에 대한 이야기인데, 작가는 실제로 거기 사는 천사처럼 아주 실감 나게 그 세상을 묘사하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죽으면 천국으로 가고 거기서 600점에 얻지 못하면 인간 세상으로 다시 환생한다.


이 소설에서 꿈은 천사들이 자신이 맡고 있는 의뢰인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기도 하다.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자크는 꿈을 통해 전달받은 암시를 소설로 쓰기도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자신의 수호천사가 꿈을 통해 암시해준 걸 소설로 쓴 건 아닐까.


이 소설 속에 삽입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유전, 카르마, 자유의지가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가 출발점에서의 비율인데, 사람은 50%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이 비율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유전적 요인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기의 카르마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고, 부모의 꼭두각시나 무의식의 장난감이 되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의 자유 의지를 도로 물러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나의 카르마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며 유전요인을 얼마나 극복했으며 자유의지를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천사들의 제국>은 꿈같은 이야기지만, 어쩐지 진짜 같은 생각도 든다. 내 가족, 내 친구, 내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그 사람들은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묶이게 되었을까. 나는 이 생을 마치면 6의 존재인 천사가 될 수 있을까. 만약 600점에 도달한다면 나는 천사가 되어 다른 세 영혼을 지키기보다는 현자로서 다시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현재 333점인 인간의 평균점수를 높이는데 기여하고 싶다.



<천사들의 제국> 같은 천국에 관한 꿈을 꾸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정말 많은 꿈을 꾸는데도 한 번도 천사가 나오는 꿈을 꾼 적은 없는 것 같다. 그건 어쩌면 죽어서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살아있으면서 우리가 자주 꾸는 꿈은 악몽이 아닐까.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


장 에슈노즈의 <일 년>은 악몽 같은 이야기이다. 카메라를 들고 쫓는 것처럼 빠른 문체는 악몽의 속도감과도 일치한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옆에서 남자 친구 펠릭스의 시체를 발견한 빅트와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죽음의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지위,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면서 그녀는 몰락하기 시작한다.


온갖 고생과 모욕과 불안에 시달리다 빅트와르가 거지꼴이 되어 일 년 만에 돌아온 파리에서는 죽을 줄 알았던 펠릭스가 맥주를 마시고 있고, 도피 기간 동안 빅트와르와 간간이 만나던 루이 필립은 그녀가 떠나고 난 후 얼마 뒤 죽은 지 사나흘 된 모습으로 욕실에서 발견되었었다고 한다. 그날 아침 보았던 펠릭스의 시체는 꿈인가, 환각인가,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루이 필립은 유령인가, 환상인가. 정말 악몽 같은 일 년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빅트와르의 악몽 같은 일 년은 정말 꿈처럼 빨리 지나간다. 작가 장 에슈노즈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에슈노즈: (…) 이 소설을 촉발한 것 중에서는 격렬한 육체의 몰락, 사회적 지위의 허약성, 기상천외한 불안성 같은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우리와는 별개의 세계 같지만 그쪽으로 넘어가는 통로는 바로 코앞에 있는 그런 세계인 셈입니다.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통로는 우리 코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통로 중의 하나가 꿈이 아닐까. 그 통로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꿈을 선택해서 꿀 수 있다면 나는 <위대한 개츠비> 같은 화려한 꿈을 꾸고 싶다. 비극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떤가, 꿈인데. 브라운 신부나 매그레 반장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이런 욕구는 어쩌면 <천사들의 제국>의 천사가 맡는 의뢰인처럼 내 욕망이나 결락의 결집 인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만나는 내가 꼭 현실의 나와 똑같은 모습, 생각, 능력을 가진 존재여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꿈이 또 다른 세상을 향하는 문이라면 내가 꿈을 통해 다른 세상의 또 다른 나를 만나듯이, 또 다른 세상의 나도 자신의 꿈을 통해 이 세상의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지금의 나를 보고 있을 또 다른 나를 위해 나는 좀 더 열심히 신나게 즐겁게 살아야겠다. 또 다른 내가 꾸는 지금의 나에 대한 꿈이 악몽이나 시시한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책 목록}


1. 은희경 <그것은 꿈이었을까>

새의 선물의 작가 은희경이 종전과는 다른 스타일로 쓴 소설. 하이텔 문학관에 ‘꿈속의 나오미’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것을 수정한 작품. 비틀스의 노래 제목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각 장. 의대 동창생인 준과 진, 노웨어맨이 알려준 레인 캐슬에서 만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은 다리에 화상의 흉터가 있는 여자-마리아, 마리암, 진은 보건소에서 만난 여기자와 약혼을 앞두고 있고, 병원을 그만둔 준은 프라하로 여행을 떠난다. 프라하 여행 중에 준이 만나는 미아와 미나. 그리고 진의 죽음. 꿈속처럼 모호하고 흐릿한 이야기.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천사들의 제국 상하>

개미의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전작『타나토 노트』와 연장선상에 있는 인간의 사후 세계를 좀 더 확장시켜, 현실적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타나토 노트의 일원이었던 미카엘 팽송이 지상의 세 인간 자크, 비너스, 이고르의 수호천사가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각각의 인물들의 시점과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등이 결합돼 흥미롭게 펼쳐진다.


3. 장 에슈노즈 <일 년>

타자기로 재즈를 연주하는 문학적 아마드 자말, 혹은 텔로니어스 몽크라고 불리는 작가 장 에슈노즈의 소설. 평론가 에릭 레나르는 장면 하나하나의 섬세한 연출은 알프레드 히치콕, 전체 서사구조는 데이비드 린치와 비교하면서 이 소설 <일 년>을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의 소설판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속도감 있는 이야기, 끝부분의 반전이 특징.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잃고 경제적 심리적으로 몰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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