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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영 Mar 22. 2019

사랑이 뭐라고 인생을,
로맨스는 별책부록

애타는, 무거운 사랑의 해결'책'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차은호(이종석)는 오랜 짝사랑을 강단이(이나영)에게 고백한 후 이렇게 말한다.


나 그렇게 애타는 사랑 하는 거 아냐. 사랑이 뭐라고 인생을 걸어. 쉬엄쉬엄했어. 그러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라고. 
- 로맨스는 별책부록 10화


밝고 맑고 깨끗한 드라마의 톤답게 그렇게 오래 혼자 사랑하고도 질척거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예쁘게 말한다고 그 사랑이 정말 한순간도 애타지도 무겁지도 않았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애타는 사랑, 인생을 건 사랑, 무거운 사랑에 관한 책들이다.


첫 번째 책은 ‘연애는 사람을 망가뜨린다’라는 도발적 문장으로 시작하는, 게다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야마모토 후미오의 <연애중독>이다. 


프롤로그의 화자 이구치는 연애중독의 희생자이다. 헤어진 여자의 분풀이 때문에 그는 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기고도 여전히 그녀가 다시 찾아올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구치를 찾아내고, 그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낸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 미나즈키. 이구치의 눈에 초월적인 뭔가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미나즈키의 존재. 그러나 그녀 역시 심각한 사랑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미나즈키는 구원을 받았다고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한 남편에게서 이제 자신을 그만 좀 쳐다보라는 얘기를 들으며 이혼하게 된다. 그 후 도시락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간간이 번역을 하면서 살아온 그녀는 대중작가 이츠지 고지로를 아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두 번 다시 연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토록 조심해왔는데, 나는 또다시 깊은 숲으로 들어가고 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괜찮다고 나는 막연하나마 자신감을 가졌다.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마구잡이로 숲 속을 내달리는 자살행위를 이제 또 할까 보냐.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또 연애를 시작하고 만다. 그것도 자신에게는 여러 면에서 꽤 버거운 상대. 그녀가 연애를 시작한 이츠지 고지로에게는 현재의 아내를 포함해서 적어도 여자가 네 명 이상 된다. 미나즈키는 그에게서 그녀들을 하나씩 떼어내려고 한다. 그녀들 중의 하나가 미나즈키가 말한다.


 “선생님하고 오래 잘 지내고 싶으면 일찌감치 다른 남자 만드는 게 좋을걸? 선생님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간 노이로제 걸려.” 
나는 덮밥 그릇을 치우던 손을 멈췄다. 요코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더니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없이 식사를 싱크대로 가져가 씻었다. 요코도 치카도, 아마 미요코까지도 이츠지 고지로와 오래 잘 지내고 싶어서 다른 애인을 만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심리적인 균형을 위해, 이츠지 고지로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그렇다, 다들 이츠지 고지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츠지 고지로는 현재로서는 ‘내 새끼 양들’을 골고루 동등하게 사랑해주고 있었다.


연애중독에서 헤어나는 방법 첫 번째는
‘하나로는 안 된다’이다.


미나즈키의 가장 강력한 상대는 천진난만한 공주 같은 그의 아내도, 똘똘한 젊은 여자애들도 아니었다. 이츠지 고지로의 피를 이어받은 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벌인 일은 이제 애타는 사랑을 넘어서 범죄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보기 좋게 실형을 먹고 만다. 이번에는 그녀가 연애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두 번째 책은 엠마뉴엘 베른하임의 <그의 여자>이다. 주인공인 서른 살의 내과 의사 끌레르는 잃어버린 핸드백을 찾아가지고 온 남자 토마스와 사랑에 빠진다. 스스로를 두 아이의 아버지에 아내가 있다고 소개한 토마스. 그녀는 이미 주인이 있는 남자, 매일 일정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토마스와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수집한다. 그가 칵테일을 저었던 노란 플라스틱 막대, 각설탕, 샴페인 코르크 마개, 그의 목소리가 담긴 응답기 테이프, 열두 송이의 마른 장미, 그리고 콘돔 봉지까지. 그녀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한 가정의 가장이어서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남자가 될 수 없는 남자 토마스에 대한 집착인지, 그 남자와 보낸 시간의 증거물의 수집인지 아리송해진다.


애타는 사랑의 대부분은 상대방과 보낸 시간의 집착에서 시작된다. 상대방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하고 싶어 하고, 상대방의 더 많은 시간을 알고 싶어 하고, 상대방의 더 많은 시간에 내가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 


지독한 사랑에 빠진 끌레르, 다행인지 토마스는 사실은 유부남이 아니었다. 끌레르와 토마스는 이제 매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머지않아 함께 살게 될 것이고,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이고, 그들은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 그녀는 가질 수 없는 그에 관한 사랑의 증거물을 수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끌레르의 독특한 지나친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토마스가 아닌 다른 남자에 관한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애타는 사랑의 두 번째 해결책은
‘다른 것, 혹은 다른 누군가로 그에 대한 집착을 해결하라’이다.


지금 그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언제나 그 사람을 대체할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당신에게 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책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다. 이 소설은 아니 에르노의 실제 상황이다. 연하의 유부남인 동구원 대사관 직원과 사랑에 빠진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그녀는 말한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말고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 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까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굳혀서 소설로 만들어버리는 작가이다. 이제는 그녀의 곁에 없는 한 남자의 그림자가 걷힐 때까지 그녀는 글을 쓴다.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고백, 그 남자가 이야기했던 도시를 여행했다던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 남자와의 밤을 준비하고, 모든 것을 그 남자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 에르노의 파편화된 장면 장면은 비단 그녀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인 그녀의 애타는 사랑은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 <단순한 열정>이라는 소설이 그녀에게 또 다른 애인-필립 빌랭-을 안겨다 주고, 또 그 애인이 그 사랑에 대한 질투를 기록해서 책 <포옹>으로 만들었다. 대학교 1학년생 빌랭은 아버지가 보던 소설 <단순한 열정>을 뒤이어 읽고, 에르노에게 편지를 보내고, 33살이라는 나이차를 던져버리고 5년 동안 미친 듯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에르노가 아직도 자신의 지갑에 A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빌랭은 에르노를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그 모든 과정을 담담히 쓴다. 에르노의 전작 <단순한 열정>의 문체와 형식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무거운 사랑의 세 번째 해결책은
‘피해 갈 수 없다면 그걸 온전히 즐기거나 아파하고 낱낱이 기록으로 남기라’는 것이다.


어찌 알겠는가. 당신의 애타는 사랑도 작품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다시는 그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기억력은 늘 생각보다는 형편없고, 기록은 언제나 자신과 거리를 두게 만든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라는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의 고백처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오로지 그 사람만을 생각하고 위하는 것은 해볼 만한 일이다. 그 사랑의 결과가 어떤 것이든 간에 어쩌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달라지게 하지 않는 사랑은 없을지도 모른다. 쉬엄쉬엄 무겁지 않게, 가 어떤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랑에 인생을 걸지 않아도 사랑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조금씩 달라진다. 그 변화가 결국은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를, 그래서 그 사랑이 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사랑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럴 수 있었던 나를 사랑할 수 있기를.


무거운 사랑의 마지막 해결책은
‘사랑, 연애, 그러니까 로맨스는 우리 인생의 별책부록이라는 걸 명심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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