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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영 Mar 29. 2019

'우아하고 감상적인' 커피와 함께 인생을

커피에 관한 기술



커피를 멈추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잔, 식사 후 한 잔, 책상 앞에 앉기 전 또 한 잔의 커피가 필요하다.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식 중 단 한 가지만 택해서 평생 먹어야 한다면, 나는 아이스크림과 커피 가운데서 30초 정도 망설이겠지만 분명 커피를 택할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 책상 위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란 것을 설명하겠다. 내 일이란 책꽂이에서 몇 권의 책을 꺼내 주의 깊게 읽고, 거기에 야구에 관한 중요한 기술이 있으면 그것을 공책에 만년필로 옮겨 적는 일이다. 나는 내 일을 해도 조금도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에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전에 한 권, 오후에 한 권. 그것이 평균 페이스.


이 글을 읽고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만약 내가 몇 권의 책을 주의 깊게 읽고 거기에서 어떤 것에 관한 중요한 기술이 있으면 옮겨 적는 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무엇에 관한 것을 옮겨 적을까. 깊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커피’였다. 그러나 커피를 마시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류는 말한다.


어느 지방도시 건 그러하지만, 평범한 학생들은 커피를 좋아한다.
-《69》


그러면서 소설 속의 겐은 토마토 주스를 마신다. 그렇다면 커피를 마시기에 적당한 나이는 언제부터일까. 무라카미 류의 《러브&팝》의 소녀 히로미도 반지 때문에 원조교제를 하게 되는 이 마당에,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도 모른 채로 커피를 마시고 있다.


히로미는 설탕 한 스푼과 생크림을 넣고 커피를 마셨다. 미지근했지만 맛있었다.
-《러브&팝》


생각해보면 나도 아주 어릴 때부터 커피를 마셨던 것 같다. 기억에 중학교 때는 확실히 마신 적이 있고, 초등학교 때는 기억 안 난다. 학교 다닐 때는 왜 그렇게 잠이 쏟아졌을까. 그때 쏟아지는 잠을 쫓는 가장 흔한 방법은 커피였다. 자판기 앞에 늘어선 줄을 떠올리면 지금도 피로해진다. 하지만 그건 피로와 동시에 위로였다. 자판기 앞에 서있는 내 옆에는 어김없이 친구가 있었고, 우리는 주머니를 뒤져 서로의 동전으로 커피를 사주었다. 종이컵에 든 따듯한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늘 그 시간들이 지나가기를 함께 기다렸다.




커피는 초조함과 기다림으로


어디를 가든 카페가 있고 어디서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커피는 세상에서 가장 흔하디 흔한 음료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책 속에서도 가장 빈번히 등장하므로 특별히 각인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커피는 역시 초조함과 기다림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음료가 아닐까.


월요일에 그녀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주말이 되어서야 나는 그녀가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약 타는 창구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은 나 혼자서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가 매일 병원에 올 때 그런 일은 하루에 한 번 뿐이었다. 그러나 만남과 기다림에 소모되는 시간 배당은 매우 다른 법이라서 그녀가 오지 않은 뒤로는 그 횟수가 서너 차례 더 늘었다. 선배에게 눈총을 받는 일도 늘어났지만 상관없었다.
- 은희경의 《그것은 꿈이었을까》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식어버린 커피. 기다리다 기다리다 또 한 잔의 커피를 더 마시게 된다. 기다림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셔야만 하는 또 한 잔의 커피는 유난히 쓰거나 싱겁거나 뜨거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포기가 찾아오고 그러면 또 한 잔의 커피가 나를 위로해줄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기에 좋은 음료는 커피이거나 술이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술보다는 커피가 낫다. 술은 내가 그 일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모면하려는 것이라면 커피는 내가 그 일을 벌써 시작했고 이미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의 짐머는 혹독한 절망의 상황들을 술로 버텨왔지만 이제는 커피를 마신다.


집안으로 들어서서 보니 술이 하나도 없었지만 새로 술을 사러 나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있었다. 어쩌면 술이 떨어진 게 나를 구해 주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그 집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에 술을 바닥냈던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30마일이나 떨어진 웨스트 T-까지 가지 않고서는 망각 속으로 빠져들 희망이란 없었으므로 맨 정신으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커피를 두 잔 마시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내 원래 계획은 망가져서 예전의 불행한 슬픔과 알코올 중독 상태로 빠져들겠다는 것이었지만 버몬트에서의 그 여름날 아침 빛 덕분에 내 안의 어떤 것이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충동을 저지시켰다.
- 폴 오스터《환상의 책》



이 세상에는 커피 파는 곳이 더 많을까, 술 파는 곳이 더 많을까. 술은 어느 때건 아무 데서 건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커피는 가능하다. 길을 걸어 다니면서 커피를 마신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당신은 언제 어디서 건 일단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잠시 휴식하거나 생각할 수 있다. 장 에슈노즈의 《나는 떠난다》의 주인공 페레처럼.


육 개월 후, 같은 시간인 열 시경, 펠릭스 페레는 북서쪽에 구름이 약간 낀 7월의 태양 아래, 루아시 샤를 드 골 공항의 B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그가 탈 비행기는 아직 개찰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계절에 맞지 않게 두꺼운 외투 차림을 한 페레는 어깨에 메는 가방과 핸드백을 실은 짐수레를 끌고 홀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일단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일회용 손수건 몇 장과 기포성 아스피린을 산 뒤, 마음 편히 기다릴 조용한 곳을 찾았다.
- 장 에슈노즈의 《나는 떠난다》


커피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페레는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 인생의 한방이 될 수도 있는 일. 그는 보물선을 찾으러 가기 전 공항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커피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기에 썩 괜찮은 음료임이 틀림없다. 커피에 든 카페인은 위와 장을 거쳐 혈류로, 혈류에서 인체조직으로 쉽게 이동해서 짧은 시간 내에 인체의 거의 모든 세포에 침투한다. 바이러스나 독소가 중추 신경시스템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인체의 방어 메커니즘 때문에 대부분의 물질이 혈액과 뇌의 장벽을 넘지 못하는 데 비해 카페인은 이 장벽을 쉽게 뚫어버린다. 카페인은 1시간 내에 두뇌에 최대치로 농축되며, 잠을 오게 하고 혈압을 내리고 심장박동을 떨어뜨리는 신경 조절물질 아데노신의 활동을 막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몇 잔의 커피를 마셨을까.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내 책상 위의 커피는 식어가고 있고 향기가 엷어졌다. 새로운 커피가 필요한 시간이다.

커피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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