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결혼해서 며느리가 되는 것이라면 기왕이면 맏며느리가 되겠다 생각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여자 막내인 나는 장손과 결혼했다. 결혼 당시 시부모님은 미국에 계셨고, 남편도 이민 준비를 하던 때다. 그래도 한국의 시댁 행사에 빠진 적이 없었다. 또한, 남편이 영주권이 나와 내가 미국에 가기 전 혼자 지내는 2년 동안에도 행사가 이뤄지는 작은아버님 댁에 늘 참석했다. 지금도 제일 속상했던 건 결혼하고 30년 넘게 친정엄마의 생신을 챙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친정엄마의 생일이 시댁의 많은 제삿날 중 한 날이기 때문이고, 미국에 와서는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미국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친정엄마 생일에 참석해도 되는데 난 미련했다.
남편의 초청으로 미국에 와보니 큰아들인 시아버지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당신은 제사가 소용없다면서,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며느리가 시댁도 없는 곳을, 일터에 휴가를 받아 다닌 햇수가 2년이 넘었는데 억울했다. 맏며느리 역할을 하느라 엄마의 생일을 챙겨드리지 못한 나의 행동이 더 후회됐다. 시부모님은 제사는 물론이고 한국명 절도 안 지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각 명절마다 음식을 만들며 친척들과의 추억이 많았기에 명절만 되면 친정을 더 그리웠다. 그럴 때면 시어머니는 미국에 친정식구 하나 없는 나를 위해 명절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한국의 주요 명절이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살아도 고향생각이 안 날 때쯤 남편이 세상을 떴다. 별안간 닥친 불행이지만 자녀에게 아빠를 기억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연스레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설, 추석, 기일 때마다 아이들과 같이 음식을 만들고 먹으면서 자유롭게 아빠를 추억하는 날이라 흐뭇했다. 아이들이 어렸기에 나는 이런 날 만이라도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산 아빠였음을, 자기 자신보다 가족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지내다 보니 큰아이와 둘째가 사회인이 되자 한국 명절과 이곳 명절의 공휴일이 같지 않아 학생인 막내와 둘만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부터 나는 제사의 여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치르는 이 제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했다. 결국은 내 마음 편하게 하자고 한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가족이 먹지 않는 음식은 구입하지 않고, 음식량을 조절해서 잘 먹는 것으로 만들면 더 좋겠다는 결론이 들었다. 제사와 추모의 목적은 가족이 모여 앉아 정답게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고인을 추억하는 것이라 나의 생각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막상 신정 당일이 되어 간소하게 만든 음식을 먹고 산소 가려는데 사회인이 된 아이들은 모두 출근을 하기에 혼자 가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의 신년은 학생들에게는 방학이라 쉬지만, 직장은 공휴일이 아니다. 일이 있어 같이 못 가는 것 을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직은 나 자신도 어는 쪽도 편하진 않았다. 나 자신이 아직 변하는 것에 서툴렀다.
다음날 아이들에게서 아빠의 산소에서 찍은 사진이 왔다. 그 사진을 보자 조금 마음이 풀렸다. 아이들은 그들 나름 아빠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제사를 지내든 추모를 하든 자기들의 방식으로 고인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은 약간의 미련도 있고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지금 정리를 한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나의 죽음에 대한 제사를 아이들에게 치르게 하고 싶지는 않기에 지금 교통정리를 한 것은 사실 필연 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맏며느리라는 수식어도 동화 속 이야기가 되듯, 차례니 제사도 아이들 세대에선 낯선 문화다. 다만 그날엔 다 같이 음식을 먹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아이들에게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하고 보니 며칠 몸이 아팠다. 아마도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 것 같다. 아이들이 가끔 산소에 간다 하니 그곳에 가는 날이 추모고 제사가 아닐까?. 나 또한 친정 부모님의 제사를 이역만리에 산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고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삶의 완성이 죽음이라면 완성된 삶을 산 그들에게 축배를 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가족이 즐겁게 음식을 나눠 먹는 것만큼 더 한 효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