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 Won Jul 05. 2020

사후 이혼


   죽은 배우자와 이혼한다는 사후 이혼은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 졸혼과 함께 유행한다는 신조어다. 사망 후 이혼이 법률상 허용되진 않지만, 친인척 관계 종료 신고서 서류만 제출하면 배우자의 친족 동의 없이도 친족과 절연되기에 신고서를 받는 일본 관공서엔 신청자가 해마다 늘고 있다고 한다. 졸혼과 달리 사후 이혼은 아직 우리 사회에선 낯설기도 하고 또한,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기 불편하기에 허물없는 친구와 가벼운 농담으로 이야기하는 정도다. 그렇지만 홀로 되어도 배우자 친족으로부터 지나친 의무나 금전적 요구를 받는 사람이나, 부모 돌봄의 강요를 받는 사람들에겐 일본에서 유행하는 것과 상관없이 솔깃한 단어임엔 틀림없다.


   나는 혼자된 지 14년째다. 경제적으로 시댁에서 도움받지도 시부모님을 모시지도 않는다. 시부모님은 정부 아파트에서 소셜 연금과 의료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다. 특별히 도움도 드리지 못하지만, 경제적 부담과 심적인 부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가장이 된 내 몫의 부양은 자녀에게 쏟아도 여유로운 살림이 될 수 없고 마음의 여유마저 없다 보니, 시부모님께 용돈 한번 시원하게 드리거나 시댁 행사에 매번 참석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정말 어렵다. 그렇다고 시댁 식구들과 살갑게 자주 만나지는 사이가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이웃보다 못한 가족이 되었다.


   남편 사망 후 몇 년 지나 한국을 방문한 적 있다. 한국 방문 시 늘 했던 것처럼 찾아뵙고 인사하기 위해 시댁 어른들께 전화했다. 그분들의 목소리엔 예전 같은 반가움이나 한번 보자는 빈말도 없었으며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번의 전화도 없었다. 조카도 없는 조카며느리인 나에게 예전 같지 않은 행동에 깊은 상처가 되어, 그 후 한국을 가도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난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 느낌을 받았고, 그분들에겐 난 조카며느리였던 과거의 사람이며 타인이었다.


   남편에겐 누나와 남동생이 하나씩 있다. 어쩌다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 나는 그 무리 속에서 살갑게 어울리지도 못했다. 동생과 형이 없이 올케가 될 수 없고, 형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말은 안 해도 서로에게 느껴지는 행동이나 행위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나 자신도 시누나 시동생이라는 관계가 예전보다 더 서먹서먹하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나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은 들겠지만 그런 마음은 나를 아는 이웃이나 친구에게서도 받는 감정들이라 특별히 감동하지는 않는다. 이웃처럼 나를 위해 마음으로 걱정해주는 관계인 것이다. 나 또한 틈이 생긴 관계가 서운하지 않다. 연결 고리가 없어진 이유 일 수도 있으며 아이들과 알아서 잘 사는 것이 곧 나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장인, 장모 묘지 문제를 사위도 자식이니 같이 준비하자는 말을 들었다는 아는 분과 대화를 나눴다. 아내도 없는데 나에게까지 연락해서 묘지를 분담하자는 말이 옳은 것인가? 라며 불쾌했다고 했다. 또한, 죽은 아내의 제삿날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지 안 지내는지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몇 해는 그런가 보다 지나갔는데 각종 경조사까지 의무를 부여하는 통에 부아까지 난다며 의무를 무의식적으로 요구하는 죽은 아내 친족들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묻는데 나는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분은 조만간 재혼할 예정인데 재혼 후에도 간섭받는 건 아닐지 걱정하는데 그 부분에선 간섭 없을 거라고 바로 대답은 했지만, 며칠 마음이 불편했다.


   배우자가 사망하여 혼자된 가정을 볼 때면 대부분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 특히 혼자된 여성들은 경제적인 고통이 남성보다 더 많다 보니 곳간이 늘 비워 인심도 후할 수 없다. 그리고 배우자 친족들과 잘 안 만나지는 게 사실이다 보니 가족에 대한 의무가 소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혼자 사는 햇수가 길어지다 보면 재혼을 안 해도 의무감이라는 단어에 발끈해지고 간섭에 매우 민감하다. 다행히 금전적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의무를 요구하기 전에 혼자 남은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주면 좋겠다.


  재혼하면 대부분 의무를 요구하지도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후 이혼과 뭐가 다른가. 배우자에 대한 제사 여부는 더더욱 간섭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혼자 남은 사람의 몫이다. 제사를 지내든, 안 지내든 강요나 간섭 말고 존중해주면 좋겠다. 나와 똑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일본에서 유행하는 사후 이혼의 의미도 모르면서 대부분 자연스레 친족과 절연된 상황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사망한 배우자의 친족들과의 교류가 없는 게 현실이다.


    나는 아직 남편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조금씩 제사에 변화를 주고 있다. 초반엔 제례에 신경 쓰면서 먹지도 않는 음식까지 준비했다면 지금은 가족이 다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만들다 보니 버려지는 것도 없다. 가족이 모여 식사하면서 고인을 추억하는 것에 더 의미를 주고 있다. 가족과 같이 모여 식사하며 즐겁게 보내는 그 장면이 진정한 제사가 아닐까. 그렇다고 남편의 제사를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진 않다. 나의 사후 제사 문제는 나의 권한 밖이다. 그것 또한 남은 자식들의 몫이므로 그들에게 해라 말라 할 수 없다. 자식 세대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고인을 추억할 것이고 그거면 되지 않을까.


    며칠 전 친정 언니에게 우스개로 “나 사후 이혼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 했더니 언니가 말하길 이제 제사도 그만하고 그냥 재혼하라며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언니는 아직 내가, 내 분수도 모르고, 시댁 걱정하는 게 싫은 것이다. 시대가 바뀌는 요즘 사후 이혼이라는 인정머리 없는 단어가 일본에선 유행해도 우리에겐 낯설고 너무 매정한 단어다. 서로 도우면서 살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 많은 현실이니, 각자의 삶을 존중해주고 응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면 소중한 인연이 유지될 거라 믿는다.



이전 13화 잎 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