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 너 살 좀 빼야 되는 거 아니냐?

온갖 성추행이 난무했던. 그리고 아직도 난무 중인 방송바닥

by 애미라이터 Aug 07. 2024

2007년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지방 방송국 작가로 합격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도 원하고 고대했던 방송작가의 꿈이 이루어진 영광의 순간.


할머니는 손녀가 방송국에 취직했다며 다니시던 경로당에 축하 떡을 돌리셨고

나에게도 방송국에 가져가라며 떡 한 박스를 해 주셨다.


세상은 온통 내 것 같았고 학교 졸업을 하기도 전 취업 했다는 기쁨에

며칠 동안은  붕붕~ 황홀한 상태로 출근을 다.

월급이 60만 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수십대의 모니터와 알 수 없는 기계들로 가득 찬 주조정실

바쁘게 오가는 피디와 엔지니어들

신기하게 생긴 편집 기계들 (그때 당시만 해도 컴퓨터가 아닌 '조그'가 달린 편집기계로 편집을 했다)

그리고 TV에서만 보던 반짝이던 아나운서들까지.


그야말로 방송국은 별천지 그 자체였고

조용히 노트북을 바라보며 글을 쓰는 작가실 선배님들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방송국에 입사한 지 (엄밀히 말하면 입사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방송작가는 직원이 아닌 계약직. 프리랜서 이기 때문에) 1주일 정도 됐을까?


지역신문을 뒤지며 다음 주 방송에 나갈 아이템을 찾고 있었는데

작가실에서 경력도 나이도 제일 많은 고참 선배님이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동의한다는 서명 좀 해줄래?"


나는 영문도 모른 체 종이를 받아 들었고 거기엔 대문짝만 한 크기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oo 피디 성추행 관련 동의서'


내용인 즉,

성인 2명만 겨우 앉을 수 있는 1평도 안 되는 작은 편집실에서

피디와 작가가 함께 편집을 하면서 실수인 척 작가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더듬으며

끊임없이 성추행을 했으니 담당 피디를 다른 부서로 좌천시켜 달라는 내용의 동의서였다.


"내키지 않으면 서명 안 해도 돼"


선배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얼른 서명을 했다.


그리고 몇 주 뒤 그 피디는 다른 부서로 이동했지만

한동안 피디들 사이에서 '그 작가 참 드세다. 같이 일하기 힘든 스타일이다'라는 수군거림을 받았다.


나도 드디어 방송작가가 됐다는 흥분과 기대가 가시지도 전

그 일로 나의 열정은 말 그대로 짜게 식어버렸고 그 사건을 시작으로

다른 집단 못지않게 방송가 역시 성추행이 난무하다는 걸 깨달았다.


생방송 준비를 위해 주조정실을 한창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데

누군가 내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야 너는... 살을 좀 빼야 되는 거 아니냐?"


"네?"


뒤를 돌아보니 50대 중반 정도 된 기술팀 부장이었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어버버 하고 있는 나에게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아니. 엉덩이가 너무 큰 거 아니냐고. 그렇게 살찌면 불편하지 않아?"


그러고는 내 옆을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너무 당황스럽고 기분이 더러웠지만 당시 나는 회사에 들어온 지 고작 2주밖에 안 된 초짜 막내 작가였고

그는 지방 방송국 정직원이자 심지어 기술국 부장이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그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직속 작가 선배들에게 고민을 털어놔도 뭐 직접 만진 것도 아니고 농담으로 한 말에 그러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 후 그 부장은 날 볼 때마다 살 좀 빼라는 외모 지적을 했고

나는 그날로 무에타이 체육관을 등록해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그 부장을 생각하며 주먹으로 발로 샌드백을 마구 때렸던 기억이 난다.

 

분노의 무에타이 때문이었는지 나는 한 달 만에 8kg 이 빠졌고

우연히 마주친 그 부장은 다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살 좀 빠진 것 같은데? 봐봐~살 빼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순간, 너 보기 좋으라고 살 뺀 거 아니다 이 변태새끼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당시만 해도 윗사람들에게 찍혔다가는 다시는 방송국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그저 누르기에 급급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방송가에서는 성추행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권력을 이용한 갑질 성추행.


50대 유부남 국장이 나랑 밤마다 데이트를 하면 서브에서 메인으로 입봉 시켜주겠다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20대 작가와 틈만 나면 모텔을 드나들던 사건으로

한때 모 방송국 작가실이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고.


모 방송국 시사교양팀 여자 국장은 방송 시사 때마다 남자 작가들과 미혼 피디들을 혼내며

"이렇게 찍어와서 시청자들 발딱 세우겠냐?" "이렇게 해서 시청자들 흥분시킬 수 있겠냐?"

라며 욕설과 성추행 발언을 하여 그 녹취록이 뉴스에 보도된 적도 있다.


다행히도 요즘은 미투 운동 등 성추행 갑질에 대항하는 분위기지만

아직도 성추행 갑질에 시달리는 '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잘릴까 봐, 갑을 잘못 건드렸다간 이 바닥에서 영원히 사장될까 봐 걱정하는 '을'들이여.

절대 참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대항하길 바란다.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거. 이제는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과연,

17년 전 그때로 돌아간다면 무에타이에서 배운 로우킥으로 부장의 얼굴을 날려버릴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1. [프롤로그] 을이면 다행이게?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