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추어리 Oct 14. 2022

[속도] 저도 약을 하긴 하는데요

유행하는 병이 뉴스에 나오기도 전에 걸렸을 때

속도


나무를 좋아하는 이에게

기차는 너무 빠르고

겨울을 기다리는 이에게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유행하는 병에

뉴스에 나오기도 전에 걸렸을 때

사실을 말하기엔 너무 빨랐고

받아들여지는 시간은 너무 느렸다


아침약 저녁약을 양손에 넣고

주먹을 꼭 쥐고도

어쩌면 내가 낫지 못한 것은

다른 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민한 나의 몸과

둔하게 깨닫는 머리와

속도를 모르는 마음이


발 밑의 자전을 무시하고

눈앞의 시계침을 무시하고

그저 시발, 시발, 시발(始發)


울기엔 너무 빠르고

웃기엔 너무 느리다


살기에

너무 빠르고 너무 느리다




진리를 뒤늦게 깨닫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반대로 내가 뭔가를 너무 빠르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참 어리둥절하다. 매사에 둔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으니 충분히 의아할 일이다. 그럼에도 내 신경은 참으로 유난하고 예민한 편이었다. 사람은 '둔하면서 예민할' 수 있었다.


돈 스파이크가 마약을 대량 소지하고 있던 것이 언론에 밝혀진 후로 마약시장에 대한 설과 담론들이 슬슬 양지로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이 마약 청정국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 이제는 몇 다리만 건너면 환각을 즐기는 지인이 있지도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나도 약을 먹는다.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공황장애 발현 이후 리보트릴과 자낙스를 필요한 때에 맞춰 먹는다. 그중에 자낙스에 대해 조금만 검색해보면, 가루를 내서 흡입해봤다는 말도 안 되는 글들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벤조디아핀계열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복용 시에 뇌가 진정되는 효과가 있으나 의존성이 커서 미국 청소년들은 마치 마약 대체품처럼 이 약을 처방을 받아 오남용 하기도 한단다. 이런 사례들 때문에 정말 약이 필요한 나 같은 사람에게 불이익이 올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멍청하게 왜 약을 할까. 유명 연예인도 그렇고 비싼 술집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그렇고, 보통 금전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이 마약 논란을 통해 나락으로 가는 걸 바라보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일반인들도 그런단다. 빅뱅 멤버들이 목놓아 '맨 정신이 난 제일 싫어'라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맨 정신으로 살기엔 도저히 팍팍한 이 시대에, 어쩌면 그들은 착각한 게 아니었을까, 나처럼 소량의 신경안정제가 필요할 때에 적절한 치료와 건강한 상담을 받지 못하고 검은 유혹을 너무 빨리 접했던 건 아니었을까(물론 불법 마약이 쉽게 유통되는 것과, 돈을 위해 남을 유혹하는 이들이 가장 문제임은 안다. 온전히 본인이 잘못된 선택을 한 마약중독자들을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 지점에서 싸구려 위로를 얻었다. 세상이 그만큼 힘든 게 맞았고, 나만 약이 필요한 건 아니었구나. 왜 하필이면 내가 공황장애에 걸려야 하는지 자신이 저주스럽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는데. 그게 아니라 세상이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다 괴롭히고 있었구나. 우리 다같이 괴로웠구나, 하면서.


어떤 문제를 너무 빠르게 감지하는 건 정말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걸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공황장애가 TV에 나오기도 전에, 김구라와 이경규가 공밍아웃을 하기도 전에 공황발작을 만났다. 갓 고등학생 티를 벗어난 나는 그 병을 너무 빨리 만났고, 세상은 이를 대처할(활용해서 돈을 벌) 준비가 너무 느리게 되고 있었다. 한의원에서는 배가 차서 그렇다며 배꼽 위에 뜸을 놔주고(여전히 이런 처방으로 돈을 버는 한의원도 많다. 아니, 더 많아진 느낌이다) 신경정신과에 가면 부모님이 이혼해서 그렇다며 무작정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한 포에 다섯 알씩 무지성으로 처방해주던 때였다.


병원은 그나마 나았다. 주변인들은 나만큼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웠을 거다. 그때쯤 가까웠던 친구들과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금세 멀어졌다. 가족들은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병명과 증상과 사회적으로 겪는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예민함)는 너무 빨랐고, 세상은 너무 느렸다. 웃긴 일 아닌가. 평범하다 못해 주변 친구들만큼만이라도 살려고 노력하던 그때, 공황장애 얼리어답터가 되어버렸다니. 지금이야 많이 호전됐지만, 10년만 늦게 걸렸어도 이 병은 더 쉽게 나았을 거다.


'너무 빠름' '너무 느림' 느끼는 날들이 무수히 많다. 세상 일이 그렇고, 사람들의 생각들도 그렇다. 너무 빨리 뭔가를 알아버린 일도, 너무 뒤늦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도 있다. 포켓몬고를 하기엔 너무 빠르지만 목적지까지는 너무 느리게 가는 고속버스처럼 '너무 빠르면서  너무 느린' 일도 종종 일어난다. 세상은 요지경, 자전도 초침도 의미없다. 자기 페이스에 맞춰  인생 속도를 따라가라고는 하지만 나처럼  스텝에 발이 꼬이는 사람도 분명 있으리라.


내 발목에 걸려 넘어져서 한바탕 뒹굴고 온 세상이 뒤죽박죽되어도, 결국엔 비틀비틀 일어나 다시 걷는 게 사람이고 인생이려니, 여전히 한쪽 팔은 남친의 어깨에 기대고 한쪽 손에는 약을 쥐고 있어도, 그 팔을 지탱해주는 힘과 꽉 쥔 주먹으로 싸워가는 게 내 복이고 팔자려니, 하면서 오늘도 살아간다. 다시 나의 시간을 찾기 위하여. 이 불친절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적당한 템포를 찾기 위하여.

이전 06화 [도와주세요]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