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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Aug 18. 2023

[지점토 인간] 상처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를 꿈꾸며

성장을 멈춘, 혹은 그만 그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날개가 세 개인 새도 되어 보았지

동그란 기차가 된 적도 있었어

형체도 모르게 자유롭던 시절


지점토처럼 무엇이고 될 수 있는

연약하고 말랑하되

그러므로 자유롭고 단단했던

사실은 누구나 그렇게 태어난단다


어찌해도 몸에 남아 있는

분에 못 견디던 어느 날


예고 없이 부는 서리바람처럼

건조하게, 건조하게

때마침

인간에겐 일순간 굳어버리는 때가 온다


돌이킬 수 없는 강렬한 상황과

이성을 뒤엎는 맹렬한 감정과 함께


어쩌지도 못하는 그날에

만들기를 끝낸

어린애는 손을 놓고


변하지 않는 어른으로

하나의 인격체는 그렇게 완성된다


창조의 숭고를 모르는 그때의 내가

뭐라고 중얼댔는지, 다만

그것만이 멈춘 몸의 숙제


이만하면 됐어, 였는지

이제 그만 포기해, 였는지

생각하는 사람처럼 굳어서 앉아본다


희고 무성한 각질의 틈새로

오늘의 바람이 분다


그대로

하루쯤 더 굳어가면서



요즘 TV는 재미없다. 그럼에도 무심하게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그녀의 스타성을 차치하고 내가 알 법한 유명인의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가끔 힐링캠프라는 옛 프로를 검색해서 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 말고도 누구나의 삶은 이렇게도 지겨워,라는 걸 공감받고 싶다. 그래도 볼 게 없으면 ‘연예인 눈물’이라고 검색한다. 어느 땐가 고현정이 수상소감에서 아이들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나는 그 영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정상에 선 이가 진심으로 슬퍼하는 장면에서 내가 지독하게 찾던 ‘사람냄새’가 진하게 압축되어 느껴졌다.


싸구려 위로인지도 모르지만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얻는 건 크게 즐겁다. 그런 점에서 오은영의 금쪽상담소는 두 번이나 쾌락을 준다. 출연자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비밀을 풀어놓고 치유받는 과정을 보며 대리만족을 얻는다. 그리고 그의 고민과 가장 유사한 나의 경험을 빗대어 이입해본다. 그러면 공짜로 팩트폭력을 얻어가는 것이 된다.


게스트 중 깨나 나이가 많은 분이 나왔다. 예능 프로그램인지라 플롯은 뻔했다. 우스꽝스럽게 자기소개를 하고, 앞뒤 맥락을 다 자른 뒤 ‘이상행동’을 부각해 말하고, 패널과 시청자가 충분히 궁금하도록 한 다음에야 그 맥락을 실마리처럼 푼다.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하고 게스트가 비밀스럽게 말하는 지점을 나는 좋아한다. 한 사람의 생을 고집스럽게도 바꿔놓은 그 이유들. 누가 보면 사소하고 나에게는 별것 아니어도 당사자에겐 인생의 형태를 아예 바꿔놓거나 굳혀버린 화학적인 사건. 뇌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PTSD가 뼛속까지 각인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안도.


나 또한 인생의 변곡점(또다시 있을지 몰라도)이 뚜렷하게 있는 사람인지라 매번 생의 방향이 뚝 꺾이는 그 지점을 이야기할 때 가장 몰입해서 이야기를 본다. 있었던 일을 없앨 수 없고, 그렇게 커다란 기억은 남의 말처럼 쉽게 털어낼 수도 없다. 단지 서투르게 살아낸 생의 강가 한쪽, 오랫동안 퇴적된 토사에 발이 턱 걸리듯이 언젠가는 멈춰야만 하는 숙명이, 모든 인간에게는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 오로지 남의 일로 느껴지지만은 않기 때문에...


시간은 자꾸 흐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도 하염없다. 그 속에 한 사람의 카이로스는 툭하면 멈춘다. 지점토로 만든 동상처럼. 말랑한 (유년) 시절 뭣도 모르고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두고, 각자의 찬바람을 맞고서는 너는 이렇게 굳었네 저렇게 굳었네 한다.


그래서 그 프로에 나온 사람들은 어디라도 일정 부분 굳어 있다. 돈 문제건, 성격 문제건 꽉 막혀서 개선이라도 할라치면 그 인간 자체가 무너질 것처럼 무언가 딱딱하게 응어리져있다. 나이가 들면 사람 잘 안 바뀌어, 그 영감 고집이 세, 하는 (이전에는 파파노인에게나 썼을 법한) 말이 이제는 너무나도 현역인 현대인들에게 적용이 된다.


죄인은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고, 그들을 자주 멈춰 서게 하는 화학작용이 너무 많을 뿐이다. 가정 폭력, 유해한 콘텐츠, 삭막한 도심, 인위적 관계, 사회적 강요, 무관심...

미성숙한 도시의 습관이 그렇게 무심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과연 생채기가 굳어진 인간은 상처를 이겨내고 마침내 견고해지는 게 맞는 것일까?


고심이 깊어지기 전에 마무리한다. 머리에 가슴에 상처투성이일 우리 모두, 너의 고집과 나의 떼를 어느 정도는 받아주고 사는, 이른바 상처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 온통 그의 잘못은 아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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