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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Dec 26. 2021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회복탄력성 제로 인간

떨어져도 튀는 공은 못되어도, 묵직하게 솟아나는 나무는 되어야지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무섭지 않은 상처라 했던가

누구라도 품고 사는

날카로운 트라우마를 건들지 않으려


지뢰밭을 지나는

최전방의 앳된 아들들처럼

발가락 끝으로 마음속을

조심조심 걸었다


이제는 터지지 않는 사장된 지뢰

발동하지 않는 매설된 분노가

눈부신 우듬지와 젖은 흙에 덮여 있는데


그 위엔 노래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고

지상에 평화가 세상엔 기쁨이 있는 것도 같은데


왜 나는 안전하지 못한가

위치가 탐지되지 않는 묵직한 쇳덩이가

젊은 나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들어


기쁜 날에도

슬픔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모르면 무식하다고 하고,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고 한다. 나름 똑똑한 편이라 생각하며 살기를 30년, 이제는 가장 위험한 인간이 '어중간하게 아는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본인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틀렸다거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때 아, 한 사람은 얼마나 어설퍼지는가.


심리학 용어에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 전공은 아니어도 감수성이 높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먹인 적 있을 테다. 소설 속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불면증이나 우울증. 환 공포증부터 심해 공포증까지 싸이월드 폴더 하나 뚝딱 만들 수 있는 각종 포비아. 언제부터인가 유행처럼 번진 공황장애와 불안장애. 요새는 정신과 증상이 흔해져 '패션 우울증'이라고 비꼬는 말도 있다고 한다.


내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8년 전 찾아온 공황장애다. 지금은 그때처럼 세상이 무너질 듯한 공황발작은 없지만 약물치료를 너무 늦게 시작해 많은 것을 얻었(?)다. 남자 친구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는 약간의 분리불안증상, 고층에 머무르기를 무서워하는 증상,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한 손에 약과 텀블러를 쥐고 가야 하는 강박증 등.


브런치를 비롯해 유튜브나 블로그를 조금만 찾아보면 공황장애를 멋지게 이겨냈다는 사람들이 참 많다. 사실 금연 같은 거겠지. 완전히 이겨냈다기보다는 그에 잠식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 증상을 통제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겠다. 이상하게 그런 콘텐츠를 볼 때면 신기하고 멋지긴 하지만 와닫지는 않았다.


한 번 겪어보면 그저 생에 대한 겁이 잔뜩 생길 만 한데, 그걸 돌파한 그들이 질투나서일까? 아님 "난 8년도 넘게 조마조마하며 사는데, 저들은 그렇게 쉽게 극복했다고? 나보다 증상이 약했겠지. 아니면 잠깐 소강상태인데 착각하는 거겠지"하고 애써 부정하는 걸까? 이 거지 같은 증상에 자부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인상 깊게 본 글귀를 캘리그래피 연습할 때 적어봤다.


아마도 그들은 '회복탄력성'이 있는 사람들일 테다. 그의 시처럼 아무리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과 같은 사람들. 아마 악동뮤지션의 <낙하>나 아이유의 <어푸>라는 곡의 주인공일 사람들. 이상하게 나는 그게 잘 안된다. 게임으로 치면,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 있는데 점프키를 못 누르고 버벅거리다가 온몸으로 받아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그들이 넘어져도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뛰어놀 줄 아는 씩씩한 아이같은 사람들이라면, 나는 혼자 일어날 생각은 못하고, 그저 누군가 달래주고 손을 뻗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막내 징징이 같은 느낌이다.


약과 약간의 용기. 나도 공황장애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됐을 때 나는 좀 더 심도 깊은 심리학과 뇌과학 책을 찾아들었다. 되려 궁금했다. 왜 같은 일을 겪고도 나만 못 일어나는지. 단순히 내가 못났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다. 심리학은 조금 따분하고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 많았는데 오히려 뇌과학 책에서 큰 도움을 많이 얻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알아도 외상 후 성장이라는 단어는 모른다. 오히려 어떤 일을 겪고 더 강해질 수도 있었다. 해외의 어느 곳에서는 'Scarred Not Scared(더 이상 두렵지 않은 상처)'라는 이름으로 서로 트라우마를 이길 용기를 심어주는 그룹도 있다고 한다.


난 그저 "아픈 일을 겪은 다음에는 당연히 트라우마가 생기고 그다음은 괴로워하는 수밖에 없어"라고 너무 쉽게 단정을 지어버렸던 건 아닐까. 알량하고 짧은 지식으로다가. 내 뇌구조를 하나하나 더듬어 이해하고 차분히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대신에, 미리 멀쩡히 극복한 사람들을 멀거니 보고만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회복의 가장 첫 번째 단계는 나라는 인간의 탄력성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한다. 이미 주저앉아 오래된 사람에게도 튕겨나갈 힘이 있을까. 그 동력은 내가 만들면 된다. 말랑말랑한 공처럼 금세 튕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지식하고 단단해 땅이 꺼지도록 깊숙이 빠져들었다가, 묵직한 힘으로 아주 천천히 솟아나는 나무 같은 사람도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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