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의 항체

전교 255등의 소년은 어떻게 '가능성'을 배달하게 되었나

by 김순경

운동장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공을 차던 시절, 내 세상의 전부는 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 넣는 것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의 깊은 한숨과 텅 빈 지갑이 내 앞길을 막아섰다. 부상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도 아니었는데, 가난은 내 축구화를 강제로 벗겼다.

꿈을 포기해야 했던 그날, 내 눈앞에는 골대 대신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만 남았다.


고등학교 1학년. 나는 목적지를 잃은 표류자였다. 선생님들에게 나는 '이미 손을 놓은 학생'이었고,

나 역시 전교 꼴찌라는 성적표 뒤로 숨어 나 자신을 포기했다. 교실은 무채색이었고, 나는 그 안의 투명인간이었다.


그때 김은정 선생님을 만났다.


방과 후 과학실, 차가운 공기 속에 담임 선생님은 나를 앉혀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환아, 외부에서 항원이 들어오면 몸은 항체를 만들어내. 지금 네 방황도 결국 너를 더 단단하게 만들 항체가 될 거야."


선생님은 공식 대신 내 손에 영어 단어장을 쥐여주었다. 알파벳도 가물가물한 꼴찌의 손등을 툭툭 치시며,

"너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셨다. 그건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버려진 가능성에 대한 '투자'였다.


전교 255등에서 150등, 다시 90등으로. 숫자가 줄어들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 날, 나는 선전포고하듯 뱉었다. "선생님, 저 나중에 서울대 갈래요." 누가 들어도 비웃을 허황된 소리였지만,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내 눈을 맞추셨다.


"그래, 창환이는 뭐든 할 수 있지. 선생님은 믿어."


그 미소가 내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그 말 한마디가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독한 바이러스를 죽이는 가장 강력한 항체였다.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나는 내 몸을 갈아 넣어 증명하고 싶었다.


아침 7시 등교, 밤 10시 하교. 졸음을 쫓으려 뺨을 꼬집고 단어를 외우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

힘들 때마다 그 미소를 떠올렸다. '선생님은 믿어.' 그 짧은 문장이 나를 책상 앞에 붙들어 놓았다.

1학년 말 전교 67등, 2학년 30등, 그리고 3학년 1학기, 내 손에는 전교 4등이라는 기적 같은 숫자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내 머리나 운을 말하겠지만, 나는 안다. 내가 펜을 놓지 않았던 건 서울대라는 간판 때문이 아니라,

내 허황된 꿈을 진심으로 믿어준 한 사람의 얼굴에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믿는다는 사실, 그것은 인간이 포기를 거부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다.


지금도 경찰관으로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그때의 과학실 공기를 떠올린다. 선생님은 내게 과학 지식을 전달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통째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를 배달해 주셨다.


이제 내가 그 배달원이 될 차례다. 치매 할아버지를 찾아 헤맬 때, 자살하겠다고 나간 누군가를 쫓아 산을 뛸 때,

학대받던 아이를 품에 안을 때, 나는 그들에게 선생님의 말을 건네고 싶다.


"괜찮아, 당신도 할 수 있어. 내가 믿으니까."


그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무너지는 인생을 붙잡는 마지막 항체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이제 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