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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Aug 17. 2021

#13. 퇴사 후 아아

절대는 없다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절대’ 마시지 않는다. 한여름에 다들 ‘아아’를 큰 빨대로 쭉쭉 들이킬 때도 나만 홀로 따뜻한 커피를 홀짝인다.


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막걸리에 물 탄 느낌이다. 안 그래도 아메리카노가 에스프레소에 물 탄 건데, 거기에 얼음까지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솔직히 커피가 아니라 커피맛 음료수가 아닌가. 심지어 카페인도 없는 것 같고 말이지. 남들이 다 ‘아아’ 마실 때 난 혼자 이렇다 할 줄임말도 없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라고 말하면 뭔가 커피에 대한 철학, 취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좋았단 말이다. 한국 사람이 유럽 여행할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어서 아쉽다지만 난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어서 좋기만 하던데, 하면서 ‘아아’족을 약 올리는 재미도 있고. 아아, 얼죽아의 유행 속에서도 유행에 휘말리지 않고 꿋꿋이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었다.


여름에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은 알아서 자기가 마실 아이스컵과 콜드 브루 원액을  가지고 온다. 처음 오는 친구에게는 아이스컵을  가지고 오라고 시키기도 한다. 우리 집에는 얼음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은 손이 큰 손님이 아이스컵을 너무 많이 사 왔다. 냉동실에 넣을 자리가 부족했다. 이것저것 빼고 옮기고 해서 겨우겨우 다 채워 넣고,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버리긴 아깝고, 냉장실에 넣으면 그냥 물 되고, 할 수 없이 나도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근데 웬열, 의외로 맛있고 시원하고 좋더란 말이다. 올여름 더위가 웬만한 더위였여야 말이지. 아이스바도 까기 바쁘게 녹아내리고. 불현듯 냉동실에 가득 찬 아이스컵이 생각나서 하나씩 야금야금 꺼내 마시기 시작했고, 한참 더울 땐 아침 댓바람부터 아이스를 마셨다. 그동안 콜드 브루나 더치커피를 선물 받으면 냉장고에서 썩어가곤 했는데 이번엔 선물 받은 것도 일찍 털어마시고, 내돈내산도 했다.


아이스컵을 잔뜩 사 온 친구가 거 보란 듯이, 그동안 어떻게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살았냐며, 지금이라도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게! 왜 미련 곰탱이처럼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셨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출근할 때는 사무실 에어컨, 지하철 에어컨, 카페 에어컨이 추워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던 거였다. 에어컨 없이 집에 하루 종일, 탱글탱글 놀면서 있다 보니 아무리 더위 잘 안 타는 천하의 나도 덥더란 말이지. 별 수 없이 아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얼죽아’까진 아니다. 벌써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아아를 끝내고 다시 따뜻한 커피로 돌아왔다. 결론은 절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안 마시겠다는 내가 아아를 흡입하며 올 여름을 날 수 있었다는 거, 그리고 한 가지 교훈은 앞으로 ‘절대’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겠다는 거. 인생에 ‘절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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