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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Mar 06. 2020

선택

세가지의 늪

집 짓기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백만 스물한 가지 선택과 결정의 과정이라고 답하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진행이 된다. 골조가 완성되고 지붕을 짜는 동안 다시 선택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창호 색깔, 외벽 색깔, 각종 문 디자인과 색깔, 싱크대와 가구, 바닥, 도배, 타일 등등등 끝도 없는 선택의 늪이다. 재밌다면 재밌고, 지옥이라면 지옥이다.


현장 소장님이 집 지을 때 나 같은 사람-돈은 없으면서 눈은 높은 사람이 제일 나쁜 건축주라고 한다. 눈이 높다는 건 칭찬으로 들리니 부정하지 않겠다. 태생부터는 아니고 국내외로 많이 싸돌아 다니면서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어찌 기회가 닿아 유명 건축가와 친분이 있어 그들이 지은 집에 가볼 기회도 있었고, 좀 산다는 분들의 집에 놀러가서 괜히 눈만 높아졌다. 그렇게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눈은 높아도 가진 만큼만 살아왔다. 같은 논리로 집도 가진 만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예산이 선택의 기준이 되었다. 예산 안에서 유행 타지 않는 무난한 것을 고른다, 가 우리이 가이드라인이다. 기성품 중에 무난한 걸로 골랐다. 정 모르겠으면 경험 많은 건축가들에게 골라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우리 집 창호 색깔도 현장소장님이 권하는 것으로 선택했다.



국내외까지 망라하여 백만가지 중에서 고르는 것도 아니고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기성품을 예산 안에서 고르는데도 선택이 쉽지가 않다. 집을 지을 땐 집이 우리 인생의 전부인 것 같고, 문 하나 타일 하나가 내 삶을 좌지우지할 것 같은 착각의 늪에 빠진다. 그때마다 정신 좀 차리라고 나를 꾸짖곤 한다. 집은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정작 생활하면서 아무 것도 아닐 일이 선택할 때는 그것이 전부인양 나를 힘들게 한다.


또 하나의 강력한 늪은 비교의 늪이다. 비교는 정말 약도 없다. 하다하다 내가 남과 비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안 그러려고 애를 쓰는데도 나란히 동시에 집을 짓다 보니 자꾸 비교하게 된다. 특히 우리는 예산 때문에 다운그레이드를 해야 하는데 옆집에서 업그레이드할때 비참하다. 괜히 우리 집이 쭈그리가 되는 기분이다. 그럴 땐 지금껏 살아왔던 신념이 흔들리고, 나에겐 없었다고 믿었던 허세와 허영심도 마구 끼어들고, 예산이라는 가이드라인도 마구 요동을 친다.


이럴 때 나에게 약은 딱 하나다.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우주에서 가장 존경하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건다. 부모님이 늘 하시던 말씀을 되새긴다. '위를 쳐다보지 말고, 아래를 살피면서 살라', '우리나라에 집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 '집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욕심 부리면 못 쓴다' 등등 부모님의 평생 철학에 매달려 이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집을 지으면 집만 짓는 게 아니다. 도를 닦아야 한다. 아직 갈길이 멀다. 더 정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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