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지 않았던 수십통의 전화와 부단하게 미워했던 마음을 속죄하고자합니다
베개가 징징 흔들린다. 놓치지 않으려고 5분 단위로 맞춰둔 알람이 일어나라고 성화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허리를 펴며 목을 돌린다. 어설픈 스트레칭으로 멍한 머리와 몽롱한 몸을 깨워본다. 지금 시간은 5시 40분, 오늘은 늦지 않게 KTX를 타러 가야 한다. 3일간의 연휴로 매진된 광주 가는 차표를 친구 덕에 어렵게 구했다.
몇 달 전 할머니가 위독해지셨다. 꽤 오래 여러 지병을 가지고 계셨지만 보기엔 건강하셨다. 입맛 없다면서 밥 세 끼는 꼭 제시간에 국그릇에 드셨고, 만나면 '결혼 해라', '살 빼라'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도 적극적으로 하셨다. 주로 다른 사람의 욕인 동네 이슈를 내게 말하며 짓는 표정도 살아있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한 고열과 낙상사고로 별안간 할머니는 누워있는 신세가 됐다. 무릎 수술을 하시고도 답답해서 걸음 보조기를 끌고 아파트내 를 돌아다니셨는데 성미 급하고, 답답한 건 못 견디는 할머니에게는 제일 큰 고역이겠다 했다.
아빠의 카톡을 받고 부리나케 내려가서 만난 병상 위의 할머니는 늘 그렇듯 서럽게 울며, 죽음의 두려움을 이야기했다. 왜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다치게 됐는 지 열불내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의외로 지금 온 가족의 관심에 즐거운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나는 깔깔 웃으며 "아이~ 할머니 금방 낫겠네. 영원히 못 볼 것처럼 그러지 마."하고 답했다. 하지만 짙어진 주름, 옅어지는 할머니의 색을 보며 심란했다. 주변의 노인분들은 할머니보다 좀 더 낫거나, 좀 더 안 좋아 보였다. 노인 병동 6인실 방문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렇게 병문안을 갔다 온 지 몇 주, 할머니는 갑자기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셨고, 치매 증상이 심해지셨다.
어떻게 가야 하나 걱정하는 내게 막냇동생은 "누나 갈 거면 마음 단단히 먹고 가. 나도 못 알아보셨어"라고 했다. 덜컥 겁이 나서 가지 못했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내가 바쁜 시기에 마음이 괴로우면 힘들어질까 두려웠다. 엄마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할 테니 또 내려오지 말라고 나를 다독였다. 다행히 할머니는 호전되셔서 요양 병원 2인실로 옮겨지셨다.
"할머니 나왔어." 할머니가 가볍게 눈을 떴다. 아빠와 똑같은 회갈색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주변 모든 것들이 퍼석한데 할머니의 눈만 반짝였다. "오늘 서울서 내려왔냐?" 할머니가 느릿하고 어눌하게 말했다. 내 대답을 대충 들으시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시집가야지" 했다. 나는 그 말에 긴장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만 웃고 말았다. 죽음 앞에서도 나한테 하는 걱정이 시집가라는 말이라니! 푸핫하고 웃은 나는 "39살에 갈 거니까 걱정마"라고 했다. 그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조차도 꺼낼 수 없어서 그 말은 하지 못했다. 할머니 손은 손 싸개에 싸여있었다. 척추가 다쳐 일어날 수 없는 몸, 손으로 침대 가드를 잡고 넘어갈까 감춰둔 손, 바삭하게 말라버린 모든 것 속에 눈만 생생했다.
집을 분 가하기 전 고등학생 1학년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요리를 잘했다. 우리 집은 식당 전에 할머니와 반찬 배달 일을 했다. 조림, 국, 반찬은 어디서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완벽했으며, 특히 감자 귀신인 나를 위해 쪄주는 감자는 지금도 흉내 낼 수 없다.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이 당연했다. 늘 깔끔하시고, 주변 정리를 잘했다. 그래서 지저분한 나랑 자주 부딪혔다. 감정 표현도 표정도 다양하고, 흥도 많고 깔깔거리고 잘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많은 모습이 할머니와 닮았다.
365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당 일하는 부모님을 대신에 할머니는 집의 어른이었다. 부모가 없으면 부모가 돼야하는 장녀인 나와 무척이나 부딪혔다. 불안한 자아로 할머니와 동생들에게 큰 잘못했던 시기였다. 어린 시절엔 할머니가 나를 '두부'라고 부르고, 나도 할머니를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며 애틋했는데 머리 좀 컸다고 가장 약자인 할머니를 그렇게 미워했다. 할머니는 늘 나를 가장 큰 손주로 애정하고, 챙겨주고 기다리셨는데, 나는 할머니의 인생을 알지도 못한 채 멋대로 결론 내리고, 밀어두었다.
새로운 요양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오늘도 침대 가드에 팔이 묶인 채, 이승에 묶여 있다.
내가 할머니를 돌볼 수 있는 여건도 아니고, 전염되는 병이 있어 관리 구역에 계셔야 하는 상황이지만, 업무처럼 가래가 빼지고, 일 생기지 않게 하얀 천에 묶여 있는 할머니의 팔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엉엉 눈물이 났다.
광주에서 일정을 끝내고 KTX에 몸을 싣는다. 나는 묶이지 않고 편하고 자유롭게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고, 내 의지 없이 병원에 넣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때가 됐을 때 자유롭게 죽고 싶다고. 할머니도 자유로워지셨으면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했다.
할머니를 생각한다. 나를 놔주시오, 나를 놔주시오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놔주시오. 글을 몰라 부끄럽고, 일 안 하는 남편, 시집살이 심한 시어머니를 만나 평생 서럽고, 아무것도 없이 늙은 나를 모른척하는 자식과 손주들 때문에 늘 서러워서 눈물이 났소. 나를 여기 묶어두지 말고, 놔주시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싸매진 손과 묶인 팔이 자꾸 생각난다.
나의 그냥 할머니가 평안하길. 돈, 돈거리던 인생의 괴로움은 내려두고 자유로우시길. 주어진 시간 동안 즐겁고 행복하던 나의 그냥 할머니 범오님씨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새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