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의 초록길'에서 먼저 만나는 가을
가을은 빈 길을 걷는 산책 같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다시 가을이 오는 시간의 순환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 앞에서 늘 설레고 환호하고 기뻐한다.
생각해 보면 단순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덥다고 에어컨을 틀고, 차문을 열면 열대야 같은 열기가 덮쳐왔고, 민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도 더웠다. 태양을 피하기 위해 한 움큼의 그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가로수 아래를 찾아갔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추위를 뚫고 나온 새싹이 반가워, 초록을 연호하고, 담장 밑 작은 냉이 꽃에도 환호하며 이젠 고난이 끝났다고 화사한 옷차림으로 나들이 갔던 기억이 생생했는데. 여름이 지나면서 봄을 잊었고, 가을이 오면서 벌써 여름의 기억을 반쯤 지웠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온에 옷소매는 길어졌고, 콧물이 흐르고 연신 재채기도 한다. 아침 뉴스의 기상캐스터는 설악산의 단풍 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단풍이 남으로 달리는 길. 가을은 길에서부터 오는가. 왠지 휑한 길 가장자리 찰랑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구절초 몇 송이와 청명한 하늘이 보이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가을이다. 외로우면 가을이거나 가을이면 외롭다.
가을을 먼저 맞을 수 있는 좋은 길이 있다. 바로 '삼한의 초록길'이다. 제천 의림지 뜰 가운데로 청전동부터 의림지까지 이어진 1.5km 남짓한 길이다. 최초 2012년 시작되었다가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2014년 부분 완공되었으며, 몇 해에 걸쳐 조경이 잘 정비되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산책길이 되었다. 제천시에서 새로운 이름을 공모해서 '시민의 푸른길'로 부르는데 나는 '삼한의 초록길'이 더 정감이 간다.
90만 평에 이르는 평야를 가로지르는 이 길은 단풍이 멋진 길이 아님에도 코스모스와 국화, 구절초, 야생화 등이 어우러져 피는 데다 양 옆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구수한 가을내음을 풍겨 계절을 제일 먼저 맞을 수 있다.
봄이 바람에 쓸려오듯 가을 역시 바람으로부터 밀려온다. 봄바람이 따스하다면 가을바람은 향기롭다. 초록길에 들어서면 바람 냄새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봄볕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는 속담이 있다. 봄에 비해 자외선 지수가 그다지 높지 않아 사람에게 필요한 비타민D의 생성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모든 식물들이 익어서 열매를 맺는 것은 가을볕 덕분이니 자연의 일부인 사람에게도 분명 좋을 것 같다.
바싹 마른 옥수수 잎새와 듬성듬성 벼베기를 끝낸 논바닥에서 더 고소한 냄새가 풍기고, 살랑이는 코스모스와 구절초, 서리를 기다리며 노랗게 꽃망울을 준비하는 국화송이. 가을에도 피고 지는 자연은 계속되고 있다.
가을은 빈 길을 걷는 산책 같다. 단풍은 화려한데 뒤태가 쓸쓸하고, 바람 끝에 묻어오는 가을 향기가 지나간 공간은 허허롭다. 진한 코발트에 목화솜 같은 흰 구름이 박힌 가을 하늘은 눈부신데 평화로운 풍경과 어울려 역설적이게도 외롭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이 우울감을 떨쳐내기 위해 유행가 가사처럼 '가을엔 떠나야' 할 것 같다. 풍경에 동화되어 느낌이 생긴 건지. 느낌 때문에 풍경이 쓸쓸해 보이는 건지. 산책 나선 발걸음은 어수선하다.
가을에 혼자 걷는 길은 쓸쓸함이 배가 된다. 발 끝에 차이는 작은 돌멩이, 외롭게 핀 들꽃 한송이에 감정이입이 되어 생각에 생각이 더해지고, 감성이 홍시처럼 농익어 금세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다. 건조함이 더해가는 가을에 감정의 분화구가 솟구쳐 올라 조화와 균형을 맞춰준다.
모든 생명체에서 유전자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가을. 지난가을의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올해가 처음인양 다시 솟아나는 건 사람에게도 가을의 DNA가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시간은 언제나 순환하고 있다. 잠시 후 찬 바람이 불면 한 여름 더위가 잊히듯 그렇게 가을도 기억에서 지워져 아득해지고 눈 앞의 새로운 계절에 충실하겠지.
올해 나의 가을 DNA는 '삼한의 초록길'에서 깨어났다. 짧은 계절이지만 쓸쓸하고 외로운 감성에 최선을 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