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해외 취재를 위해서는 사전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 자료 조사를 통해 인터뷰이(인터뷰 대상자)를 찾고 현지 코디네이터한테 섭외를 요청한다. 비틀스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면서 제일 먼저 읽었던 책은 바로 비틀스의 유일한 공인 전기 작가인 헌터 데이비스 (Hunter Davies)가 1968년에 완성한 〔비틀스: 공인 전기(The Beatles: The Authorized Biography)〕였다. 그리고 이 작가를 꼭 섭외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운 좋게도 그와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헌터 데이비스 씨가 비틀스 유일한 공인 전기 작가가 된 사연은 이렇다. 1966년부터 그가 비틀스 전기를 쓰기로 했을 때 매니저인 브라이언이 자서전이 출시되고 나서 2년 동안은 아무도 똑같은 것을 출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기는 1968년에 출간되었다. 비틀스는 1970년도에 해체되는 바람에 그는 운 좋게도 비틀스 유일한 공인 전기 작가가 되었다. 그러니 그가 느끼는 자부심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인터뷰는 런던 시내 주택가에 자리 잡은 작가 집에서 이뤄졌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2층 응접실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비틀스와 관련한 귀한 사진 액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링고(Ringo Starr)가 직접 찍었다는 원본 사진, 작가네 가족이 폴 집에 가서 장난치며 찍은 사진, 존 사인이 들어있는 사진, 비틀스의 빼지 등 그야말로 비틀스 보물창고 같았다.
응접실에는 온갖 종류의 책으로 서재가 꽉 차 있었다. 그는 축구광 팬이기도 했다.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펠레가 신었던 축구화, 또 1950년대 축구공 등 축구와 관련한 진귀한 기념품들도 그의 서재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잉글랜드 축구감독이자 전 선수인 웨인 마크 루니 (Wayne Mark Rooney)와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한 잉글랜드의 전 프로 축구 선수인 폴 개스코인(Paul John Gascoigne) 전기를 쓰기도 했다. 축구 이야기 만으로도 하루해가 짧을 것 같았다.
그는 우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기자 출신답게 오히려 탈북청년들을 취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전에 우리 취재진 중 북한에서 온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누가 북한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언제 왔는지, 부모님이랑 같이 왔는지, 같이 오지 못했으면 부모님이랑 연락은 되는지, 북한에서는 어떤 언어를 쓰는지, 억양은 존재하는지 등 수많은 질문을 쏟아 냈다. 취재진 중 한 명의 헤어스타일을 보고는 ‘비틀스 헤어컷’이라면서 농담까지 건네는 유머러스한 분이었다.
우리는 그와의 인터뷰를 서둘러야만 했다.
그는 비틀스가 전설인 이유로 곡을 만드는 능력을 꼽았다. 당시 로큰롤의 황제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작사, 작곡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불렀는데 비틀스는 100여 곡이 넘는 곡들을 직접 만들고 노래하는 재능을 가졌다. 비틀스의 위대함으로는 창의성을 꼽았다. 그 당시만 하드래도 비틀스만큼 창의적인 그룹이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밥 말리(Bob Marley) 정도뿐이었다. 또한 비틀스 사후 미치는 영향력도 위대하다고 했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경우 비틀스보다 앨범을 많이 판매했으나 잭슨 사후 비틀스만큼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는데 비틀스 콘텐츠를 가지고 전 세계에서 5천 명 이상이 밥벌이를 하고 있어 비틀스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 측면이다. 그 5천 명 안에는 헌터 데이비스 자신 또한 포함된다고 했다. 비틀스는 이처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비틀스 멤버를 만나면서 있었던 곡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어느 날 존을 만나러 집에 갔는데 그날은 특별히 묵언을 하는 날이라고 했다.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도 말을 안 하고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말을 안 하고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면서도 말을 안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삐뽀삐뽀 하며 울렸는데 그 소리를 따라 하더니 바로 <I’m The Walrus>라는 곡을 만들었다. 실제로 이 곡을 들어보면 중간에 사이렌 소리 같은 맬로디가 들린다. 사이렌 멜로디를 경계로 클래식의 장단조가 있는 것처럼 장조에서 단조로 완전히 바뀌는 멜로디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비틀스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역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틀스는 청년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다. 무대에서 침을 뱉고 욕도 하면서 연주를 하는 밴드였는데 매니저인 브라이언이 그들에게 “너희들이 런던으로 올라가서 활동하게 되면 양복도 입고 프로답게 행동해야 된다.”라고 하면서 이들을 스마트한 밴드로 만들었다. 특히 존은 양복 입는 것을 싫어했는데 양복을 입게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매니저인 엡스타인은 그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고 음악적인 것은 조지 마틴이 전적으로 담당했다. 폴의 경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정말 잘 나타내는 반면에 존은 생각은 많은데 그것을 표출하는 능력은 출중하지 못했는데 조지 마틴이 존의 음악적인 재능을 살려주었다. 예를 들어 <Yesterday> 같은 곡의 경우 조지 마틴이 오케스트라가 들어가는 부분의 악보를 그려주기도 했는데 리버풀 하드 데이즈 나이트 호텔(Hard Days Night Hotel)에 가면 조지 마틴이 직접 사인한 <Yesterday> 악보가 전시되어 있다.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이 바로 비틀스를 위대한 밴드로 만든 주인공들로 제5의 비틀스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비틀스의 공인 전기 작가로서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비틀스가 1967년도에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을 녹음할 때 곡을 연습장에 쓰고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게 쓰레기통에 들어가면 다 불타 없어져 버릴 텐데 그걸 자기한테 달라고 하니까 ‘그때 20대 청년들이 뭘 알았겠냐’면서 그걸 가지라고 해서 비틀스의 많은 자료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 자료들 중에 일부는 런던 국립도서관에 기증했고 나중에는 모든 자료를 기증한다는 유서를 써 놓았다고 한다. 비틀스의 유일한 공인 전가 작가한테서 듣는 비틀스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으며 비틀스의 귀물들을 보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끝으로 그는 1986년 세미나 차 러시아를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러시아 청년들이 비틀스 음악들을 다 알고 따라 부르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러시아에 비틀스와 관련해서 어떤 음반이나 가사, 책자가 들어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때 그는 ‘이 청년들은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겠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남과 북, 한글이라는 단일어를 사용하는 측면에서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2018년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에 남과 북이 음악을 통해 서로 소통하다가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버려 아쉬움이 남는다. '고향 생각나실 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며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평양에 울려 퍼진 강산에의 눈물 어린 호소, 어찌 강산에 마음뿐이겠는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남과 북, 음악을 통해서라도 거리감을 좁혀나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 추천곡
- The Beatles <I’m The Walrus> 사이렌 소리와 같은 멜로디에 귀 기울여보자.
- 강산에 <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