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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Dec 06. 2021

#8. 후기식민주의 퍼포먼스 작가, 코코 푸스코

I Like Girls in Uniform

코코 푸스코의 자전적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Coco Fusco: I Like Girls in Uniform(2006) by Wagner Morales


영상 1. https://www.youtube.com/watch?v=bgqPEeHP5Vg


코코 푸스코(Coco Fusco, 1960~) 작가소개

1960년생 뉴욕출생, 퍼포먼스, 비디오, 사진, 출판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작가이다. 쿠바계 미국인으로 쿠바혁명이 일어난 해에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버지와 쿠바인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 정권에 반대하는 쿠바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푸스코의 친척들도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푸스코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문화 속에서 자랐고, 백인보다는 어둡고 흑인보다는 밝은 피부색 때문에 민족과 인종 모두에서 혼종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작가의 개인사를 반영하듯 푸스코 작품은 주로 후기자본주의/후기식민주의 시대 인종을 가로지르는 혼종적 정체성과 쿠바인의 이산의 역사를 다룬다.  



코코 푸스코는 1960년 뉴욕에서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버지와 쿠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직업적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쿠바인으로 푸스코가 태어나면서 당시 미국 이민법에 따라 푸스코의 보호자로써 거주권을 얻게 된다. 푸스코의 어머니는 1954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의대 과정을 마친 뒤 취직했지만 곧 불법이주자 신분에 놓이게 되어 추방될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푸스코를 임신하게 되면서 푸스코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민 귀화국으로부터 숨어 있었다. 이후 당시 미국의 이민법에 따라 푸스코와 함께 본국인 쿠바로 추방되었고, 몇 주 뒤 푸스코의 미국 시민권으로 미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푸스코는 가족들에게 미국 이주의 발판이 되어준 앵커베이비(Anchor Baby)였다. 


푸스코의 어머니가 미국으로부터 추방당했던 1959년 아바나의 미국대사관에는 쿠바를 탈출하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쿠바 혁명이 일어난 직후 사회주의 혁명이 가져올 정치경제적 구조의 변화에 따른 재산상의 손실을 우려한 쿠바의 상류층과 중산층은 가장 먼저 쿠바를 탈출하였다. 1959년 바티스타(Batista y Zaldivar) 독재 정권을 전복한 카스트로의 혁명은 탈식민적 민족독립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개혁운동의 차원에서 토지개혁과 산업 국유화를 추진하면서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맑스-레닌주의(Marxism–Leninism)에 입각한 민족주의적이고도 사회주의적인 성격의 정부를 수립했다. 이러한 결정은 이후 1961년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미국과의 심각한 대립의 원인이 되었다.


혁명 초기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불가피한 개입에 따라 쿠바 혁명이 단기간에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으며, 혁명으로 인한 혼란이 끝나고 이전의 질서로 되돌아가게 될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미국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의 쿠바 경제봉쇄 정책과 양국 간의 외교 전쟁, 그리고 국내 ․ 외적 불안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에 의한 사회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쿠바 망명자들은 점차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보호 하에 있었던 망명 초기 쿠바인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한 자유주의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적 목적의 망명자가 증가하였고 이어진 미국의 경제적 침체로 인해 쿠바 망명자들의 특권적인 위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1980년 미국정부가 인종 구분에 ‘히스패닉(hispanic)’을 추가하기 전까지 미국사회의 인종 구분법에서 벗어난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은 변칙적 인종 또는 흑인으로 간주되었는데, 결국 쿠바인들도 여느 라틴아메리카 이민자들처럼 미국의 이분법적인 인종 질서에 따라 흑인으로 분류되었다. 인종차별주의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사회 질서였기 때문에 비유럽 출신의 유색인 이민자들은 정책적인 무시와 인식적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제도적인 차원에서 행해진 흑백 분리주의와 미국 남부 지역에서 빈번히 일어난 흑인에 대한 백인의 폭력과 린치 사건은 미국 전역의 흑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푸스코의 어머니가 미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접했던 뉴스는 에멧 틸(Emmet Till)에 대한 것으로 흑인이 백인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로 린치를 당한 사건이었다. 인종차별과 흑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뉴욕에 살고 있던 푸스코의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푸스코의 부모는 위협적인 외부세계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박적으로 노력했다. 그들은 언어에 대한 질문보다 인종에 대한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인종적 편견에 대한 감각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흑인에 대한 폭력과 편견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인종적으로 관용적인 유태인 학교와 아일랜드인이 많은 교회로 아이들을 보냈다.


한편 쿠바인들은 1960년부터 약 30년간 4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대규모 이주를 하였다. 푸스코의 친척들과 친구들 또한 매년 미국으로 왔고, 푸스코의 집은 갓 미국에 도착한 가족들과 친척들로 넘쳐났다. 쿠바 혁명 이후 십년간 푸스코의 가까운 가족들과 사촌, 조카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들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항상 일정기간 동안 푸스코의 집에 머물렀다. 푸스코는 8살 때부터 조카들과 나이 많은 친척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통역을 했다. 마치 쿠바인의 작은 공동체와 같은 집안 환경에서 그녀는 미국과 쿠바 이 두 장소 모두에 속해 있는 미국인이자 쿠바인인 이중 문화를 배경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푸스코는 상이한 두 문화가 공존하는 일상에서  이중 언어와 이중 문화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다문화적 감각을 습득했다.


쿠바인의 시선에서 볼 때 다른 이민자들과 달리 영어 사용에 능숙했던 푸스코는 지나치게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이였다. 어린 시절 푸스코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때로는 미국인의 어설픈 스페인어를, 때로는 멜로디 같은 영어 발음을 흉내 냈다. 그녀와 동생들은 쿠바인 친척들에게는 버릇없는 양키 꼬마처럼, 미국인 친구의 부모님에게는 예의 바른 라틴계 아이처럼 행동했다. 푸스코는 두 문화를 장난스럽게 오고가면서 각각의 문화를 흉내 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영상 2. https://www.youtube.com/watch?v=ATUjILtrbzc


성장하면서 푸스코는 인종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는 푸스코의 혼혈성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미국사회의 이분법적 인종구분과 혼혈인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은 푸스코의 다문화적인 배경과 혼종적인 정체성을 문제시 했다. 그녀는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집단에서도 저항적인 흑인운동 집단에서도 혼란의 기호로 여겨졌다. 그들에게 푸스코는 충분히 희거나 검지 않았고 어떠한 억압의 흔적도 분명하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푸스코는 어떤 집단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으며 인종과 민족에 관련된 어떠한 논의에서도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비록 푸스코는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개의 세계 중에서 여성에게 허용적이고 자유로운 미국 문화를 선호했고 이에 동화되어 갔지만, 내 안의 “라틴아메리카를 제거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절단 행위들은 내게 응당한 값을 치르게 했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저서에서 “결코 좁혀지지 않는 인종적 차이에 대한 미국인의 차별적인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존재가 됨으로써 나는 그 값을 치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자라온 풍부한 문화들 속에서 길을 잃었고, 영원히 오해되었다.” 라고 밝혔다. 이처럼 푸스코는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 그녀의 인종적 ․ 문화적 혼종성은 그녀를 집단의 외부인이자 경계인으로 밀어냈고, 푸스코는 국적-인종-민족의 불일치 속에서 미국인으로서의, 쿠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했다. 


쿠바인 뿐 만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진 디아스포라로 인한 라틴아메리카인들의 혼종적 정체성은 이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주변부로 밀어내는 주된 원인이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는 경제적 동인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 라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끊임없이 반복된다. 특히 푸스코와 같이 다양한 혈통이 복잡하게 얽힌 카리브 지역에서 태어나 서구의 중심도시로 이주한 카리브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문제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흰 피부에 아프로(Afro) 머리를 한 쿠바계 미국인인 푸스코는 자신의 정체성이 때로는 흑인으로, 때로는 라틴계로, 또는 그 사이에 있는 어떤 것으로 주어진 맥락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것을 경험해왔다. 이처럼 국적과 인종적 · 민족적 범주가 일치하지 않는 혼혈인이자 동시에 이민자인 이들은 언제나 복수의 정체성을 넘나들게 된다.


이와 더불어 쿠바인들의 정체성은 정치적인 특수성을 띤다. 망명 쿠바인 공동체의 정치적인 경직성은 쿠바계 이민 2세대와 마찰을 일으켰다. 어린 시절 부모의 결정에 따라 쿠바를 떠났거나, 망명 쿠바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들은 쿠바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쿠바에 대한 막연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미국인으로 자랐지만 미국식 자유주의의 신봉자도 아니었고, 쿠바혁명에 대한 극렬한 반대자도 더욱이 쿠바혁명의 지지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부모와 자신들의 기원인 쿠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극으로 나뉜 쿠바사회와 파편화된 쿠바의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했다. 


따라서 쿠바계 이민 2세대들은 쿠바에 남은 쿠바인들과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 공동체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당시 “쿠바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배신행위로서 경계되었다. 이것은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 공동체의 우익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반역자가 되는 것이었고, 카리브의 수용소로부터 우리를 구해준 부모에게는 배은망덕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스코는 결국 1980년대 초 쿠바 여행을 결정했고, 망명 쿠바인 공동체는 이를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쿠바 여행은 푸스코를 이와 같은 양극화된 세계에서 벗어나게 했다. “나는 쿠바 여행에 대한 나의 결정이 곧바로 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내 의지를 넘어 내 자신의 삶을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역시 내 자신에 대한 이해의 문이 나를 디아스포라의 아이로, 냉전과 시민권 운동의 아이로, 그리고 검은 카리브의 아이이면서 쿠바와 미국의 아이로서도 열리게 된 것을 의미했다.” 라고 푸스코는 말하면서 세계의 어느 한 쪽을 택하기보다 자신을 둘러싼 혼종적인 모든 요소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결코 분리될 수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는 그녀가 마이애미와 쿠바로 대표되는 대립적인 두 세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아메리카 대륙이 지나온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게 된 것을 의미했다. 결국 푸스코는 자신의 복합적이고 경계적인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주어진 정체성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한편 망명 쿠바인들이 본국에 남은 가족과의 상봉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시기에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좌익 폭동이 일어났다. 미국정부는 공산주의 확산 저지를 위해 중앙아메리카로 파병할 라티노 남자들을 활발히 모집하였다. 푸스코의 남동생 아르투리토(Arturito)도 그 중 한명 이었다. 당시 푸스코는 차별철폐조항에 따라 소수자 우대 정책으로 브라운 대학에 입학하여 주류세계에 편입한 혜택 받은 소수 엘리트였다. 비록 그녀는 학교의 수업과 연구에 소수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 되어있다는 것과 함께 아카데미의 세계와 자신이 살아온 문화적 환경과의 거리차를 느꼈지만 눈앞에 당면해 있는 엄청난 양의 학문적 성과를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아르투리토가 온두라스 해안지역에서 지뢰와 부딪혀 사망하면서 푸스코의 정치에 대한 다소 순진하고 막연했던 생각과 태도는 뿌리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공식적인 보고와 다르게 남동생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지점이 있었다. 부대 소대원들과 충돌했던 점이나 부정한 일의 목격자로써 악몽에 시달려왔다는 점 등 남동생의 유품에서 느껴진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단순 사고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푸스코는 대외적으로는 다문화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소수자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미국정부의 위선적인 태도에 직면하게 되었다. 푸스코의 가족이 끊임없이 도망쳐왔던 폭력적인 외부 세계는 남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고 이는 푸스코 또한 불평등한 권력 구조에 의해 소외된 타자들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건 이후 푸스코는 서구 유럽 중심의 시각으로 구축된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모두 버리고 연구실을 떠났다. 그리고서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개의 문화인 미국문화와 라틴문화로 양분된 삶을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타자들 간의 차이는 물론 자신의 정체성의 기호를 재구축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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