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커플(A Couple in the Cage)>(1993)
1980년대 후반 미국 미술계를 장악한 정체성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은 민권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쟁점화된 인종과 민족, 젠더에 대한 논의들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및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 담론을 바탕으로 펼쳐졌다. 그 중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연안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혼종적 정체성을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학을 가시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면서 미술계에 부상하였다.
1991년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들떠 있던 해였다. <경계 92년 비엔날레(Edge 92' Biennale)>(1992) 역시 지난 500년을 축하하며 유럽 문화의 심장이었던 영국의 런던과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푸스코와 고메즈-페냐는 1493년 콜럼버스가 카리브 지역에서 데려온 아라와크인(Arawak)이 스페인의 법원에서 죽을 때까지 전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마드리드에 있는 콜럼버스 광장에서 그의 ‘발견’을 기념하기 위한 풍자적인 퍼포먼스를 계획했다.
식민지 원주민의 환영
코코 푸스코와 고메즈-페냐는 유카탄 반도 인근의 가상의 섬 관타나위(Guatinau)에서 최근에 발견된 아메인디언(Amerindians) 한 쌍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서구를 방문했다고 가정했다. 황금우리의 철창에 갇힌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 스페인 마드리드를 다시 찾아왔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퍼포먼스 <두 명의 미지의 아메인디언이 1992년 마드리드를 방문하다(Two Undiscovered Amerindians visit Madrid of 1992)>(1992)는 19세기 유럽의 도처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인간 전시 관습을 재연(re-enact)한 것이다.
퍼포먼스는 서구의 인간전시의 풍습 그대로 푸스코와 고메즈-페냐가 미지의 세계에서 서구를 갓 방문한 아메리카인디언으로 가장하고 사자우리에서 삼일을 보내며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우리 밖의 관리인이 관람객들에게 관타나위섬과 아메리카인디언에 대해 설명해주고, 일정시간 마다 이들에게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이고 체인을 묶어 화장실로 데려갔다. 푸스코와 고메즈-페냐는 과거의 민족지적 인간 전시와 유사하지만 완벽하게 같진 않은, 하지만 어딘가 있을 법한 라틴풍 원주민의 모습을 연출했다. 푸스코는 원색으로 칠한 얼굴에 검정색의 긴 가발머리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훌라풍의 라피아야자(raffia)잎 스커트와 비키니형의 탑을 입고 흰색 테니스 신발을 신어 육감적이고 이국적인 원주민의 스타일로 동시대의 패션 아이템을 뒤섞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한편 고메즈-페냐는 S/M 코드를 연상시키는 징 박힌 검정부츠에 화려하고 위압적인 목걸이를 착용하고 레슬러 복면에 길고 곧은 검은 머리를 한 반항적이고 마초적인 원주민 남성의 모습이었다.
퍼포먼스는 휘트니 미술관의 제안을 받아 스페인, 영국, 미국의 여러 지역과 호주와 아르헨티나 등으로 순회공연을 했다. 작가들은 영국과 스페인과 같이 역사적으로 인종차별적이고 착취적인 식민 역사가 있는 국가와 도시를 주요 무대로 선택했다. 또 인간 전시의 문화를 재연하기 위해서 박물관 외부의 광장이나 공원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리고 가상의 퍼포먼스라는 것을 표명하지 않고, 관람객들이 주어진 정보와 관리인의 도움만으로 펼쳐진 상황에 대해 직접 판단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식민주의의 역사를 지닌 장소에서 제국과 식민, 중심과 주변, 정복자와 피정복자로써의 최초의 만남의 장면을 재연하여 서구인과 비서구이 새롭게 다시 만남으로써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폐기하고 착취와 차별로 이뤄진 관계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뉴욕의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는 야외에서 진행되었던 전시를 박물관의 실내로 옮겨와 박물관의 전시실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도록 재구성 했다. 전시실 내부는 민족지적인 국제 박람회의 서커스 무대처럼 꾸며져 중앙에는 박제된 코끼리가 놓여 있었고 그 맞은편에 푸스코와 고메즈-페냐의 황금우리가 디오라마(diorama)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관타나위 섬과 아메인디언에 대한 정보가 브리타니카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ica)에 등재되어 있다고 제시하고 이와 함께 관타나위 섬의 위치가 표기된 지도를 제공했다. 또한 관타나위의 역사와 부족의 신체적 특징과 행동 양상에 대한 설명을 유명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 지어 서술함으로써 제시된 정보에 신빙성을 더했다.
아메인디언
1) 극동지역의 신화적인 민족으로 세네카(Seneca)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와 함께 전설적인 역사와 연관되어 있다.
2) 관타나위 사람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중에 하나
관타나위의 남성과 여성의 특성과 이들의 습성에 대해서는 “관타나위 사람들은 유쾌하고 장난기가 많으며 서구의 산업화된 대중문화의 잔해들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 애니미즘적 종교 의식을 수행하며 타인을 개의치 않는 야성적이고 충만한 성 풍습 때문에 박물관 내에서도 성적인 역할 놀이를 하며 서로를 마사지하면서 할퀴는 것을 즐긴다고 서술했다.
사자우리에서 푸스코와 고메즈-페냐는 가상의 관타나위의 언어를 사용하였고, 코카콜라를 마시고, 역기로 운동을 하거나 노트북을 사용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그리고 관람객들의 여흥을 위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기부금 상자에 돈을 넣으면 랩 댄스 음악에 따라 푸스코는 춤을 추었고 고메즈-페냐는 만들어낸 엉터리 언어로 관타나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작가들은 유머러스한 태도로 자신을 한껏 드러내는 한편 흥미를 갖고 다가오는 관람객들에게는 위엄 있는 거만한 원주민을 연기했다.
퍼포먼스는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진짜” 원주민에 대한 모습을 의식적으로 차용하여 서구인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야만인’에 대한 원형적인 이미지를 되살려냈다. 우선 우리 속의 관타나위인은 원시적인 애니미즘을 신봉하는 계몽되지 못한 존재이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과도한 성적 행위를 즐기는 매혹적이지만 야만적인 존재, 그리고 동물처럼 우리에 갇힌 자신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순수하지만 지적 능력이 부족한 열등한 존재라는 측면에서 타자에 대한 서구인의 환상을 종합적으로 반영했다. 관타나위인을 설명하는 서술 방식 역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하던 인류학적이고 유사과학적인 전통을 따라 푸스코와 고메즈-페냐의 신체를 특정 생물 종(種)을 대표하는 남성과 여성의 표본으로 다루었다. 의례히 전시물을 범주화하고 인류학적 대상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다루는 박물관의 서술 방식을 차용하여 관타나위 인의 존재를 있음직하게 만들었다.
남성은 72킬로그램, 1.77미터, 대략 37세이다. 그는 매콤한 음식과 부리또와 다이어트콜라를 좋아하며, 가장 좋아하는 담배브랜드는 말보로이다. 전문가들이 보기에 우리 안을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그가 섬의 정치적 지도자였다고 추측하게 한다.
여성은 63킬로그램, 1.74미터,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그녀는 샌드위치, 팟타이, 허브티를 좋아한다. 그녀는 다재다능한 댄서이며, 부두 인형을 만들고, 칵테일을 제조하며 남성 파트너를 마사지하면서 가정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것을 즐긴다. 그녀의 얼굴과 몸의 치장은 그녀가 곧 부족의 상류계층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것을 말한다.
과거 서구의 인간전시는 지역의 풍토를 반영한 동식물과 함께 식민지의 원주민들은 전시하여 이들이 ‘전통적인 과업’을 수행하도록 했는데, 퍼포먼스에서도 역시 이국적인 물건들로 우리를 가득 채웠고 두 명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과업’을 진행하였다. 우리에서 단조롭게 반복되는 먹고 자는 일상생활은 과거와 다름없었지만 이들의 과업은 관람객들이 의례히 기대하는 전통적인 뜨개질이나 소쿠리 만들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일단 푸스코와 고메즈-페냐는 우리의 내부를 플라스틱 재질의 심장을 걸어놓거나 슈퍼마켓에서 사온 주방용품으로 꾸며 다소 의아하면도 익숙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노트북을 사용하고 잡지를 읽었다. 이와 같은 관타나위인의 일상생활은 최신 문물과 진보적인 기술에 매혹되어 있는 이국적인 원주민들이면서도 질 낮은 플라스틱 가짜 모형으로 잔뜩 치장한 하위문화 향유자들에 가까웠다.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계몽주의적 개념에서 비롯된 이국적인 비서구인에 대한 인식은 17세기를 전후하여 문학작품을 통해서 대중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서구인의 식민적 환상은 콜럼버스의 대륙 탐험 이후 비서구인에 대한 인간전시가 시작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강화되었다. 1493년 이래로 서구에서 약 500여년에 걸쳐 지속된 서구인의 민족지적 인간 전시의 관습은 유럽의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발전했다. 백인들이 발견한 비서구 지역의 원주민들은 포획되거나 매수되어 마치 동물처럼 극장, 공원, 박물관, 동물원, 서커스, 세계 박람회와 프릭쇼(freak shows) 등 각종 행사에 전시되었다.
19세기에 대중적으로 크게 유행한 이러한 형태의 인간 전시는 유럽인과 북아메리카인의 미학적 고찰과 과학적 분석 그리고 유흥을 위해 기획되었으며 유럽인의 식민주의와 미국인의 팽창주의, 그리고 도시 중심부의 성장과 인구증가로 인해 급성장한 대중문화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전시를 통해 중세 유럽의 야만인에 대한 미신적인 인식은 세계 각지에서 온 비서구인들에게 그대로 투영되었고, 이후 출현한 과학적 이성주의에 의해 비유럽 인종들의 유전적인 열등성의 증거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목전에 둔 1992년은 세계적으로 문화 다양성 존중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미국에서는 다문화적 정책이 입안되어 비인도적인 인종적, 민족적 차별이 공식적으로 철폐된 시기였다. 때문에 식민세계를 개시한 상징적 사건인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함께 시작된 식민역사는 ‘서구와 비서구 세계의 만남’으로써 기념할만한 일이기 보다는 비판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시점에 있었다. 또한 푸스코와 고메즈-페냐는 라티노 정체성에 관한 작품을 만들고 논쟁적인 담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미술가와 미술가의 작품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작가의 출신지와 인종에 기반한 차별적 스테레오타입 안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문화적 정체성을 다루는 퍼포먼스 아티스트로써 타자에 대한 미신과 스테레오타입을 널리 퍼트리고 재생산하는데 기여한 인간전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퍼포먼스를 통해 탐구하고자 하였다.
퍼포먼스는 문화 간의 경계 지점 또는 문화 간의 교차점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상호 문화적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이러한 지점에서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상호작용적인 열린 형식을 채택했다. 더욱이 각 장소의 역사문화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 순회공연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장소성과 관객성을 동시에 고려한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가 되었다. 그 결과로 특정 장소에 놓인 황금우리는 세계 각지의 관람객들의 인종주의에 대한 인식을 반사해주는 장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관람객들과 상호작용은 현실에 구축된 보이지 않는 황금우리를 넘어 우리의 안과 밖을 연결하여 정형화된 타자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열쇠였다.
작가들은 인간 전시의 대상이 되었던 원형적인 원주민을 재연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을 모두 갖춘 캐릭터를 만들어 인종주의의 패러다임을 표면에 노출시켰고, 여기에 코카콜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는 ‘현대인’의 모습을 결합하여 혼종적인 원주민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질적 요소들을 덧붙여 창조된 현대적인 ‘원주민’의 캐릭터로 작가들은 관람객이 인종주의적 태도를 지속하는 것을 불편하고 낯설게 느끼기를 기대했다. ‘원주민 같지만 원주민이 아닌’ 인물들을 통해 서구인들의 원주민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원주민들의 삶을 동시에 보여주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관람객을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질적인 요소들은 이국적 타자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가진 관람객들에게 낯설고도 익숙한 사이 내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장치였다.
푸스코와 고메즈-페냐는 황금우리 안에서 그들을 향해 표출되는 서구인의 욕망을 바라본다. 타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작가이자 이국적인 타자들은 응시의 대상에서 관찰하는 주체가 된다. 주체와 타자의 위치를 뒤바꾸는 ‘뒤집힌 민족지학’에서 시선의 방향은 이국적 타자로부터 서구 관람객으로 향한다. 곧 관찰 대상이었던 타자가 주체의 욕망을 관찰하는 주체가 되면서 시선의 중심이 타자인 나를 바라보는 ‘그들’로 옮겨가게 된다. 즉 무게 중심이 타자성이 창조된 근본 장소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견고했던 타자의 이미지는 희미해지고 황금우리 안을 바라보는 주체의 욕망만이 남게 된다.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한 <우리 안의 커플>에서는 시청자가 관람자와 퍼포머 양쪽의 시선을 모두 볼 수 있는 제 3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시선의 방향은 쌍방향으로 교차되고 확장된다. 이는 관람객을 끊임없이 경계적인 인식의 지점을 횡단하게 하면서 주체와 타자의 위치를 유동적으로 오고가게 만드는 효과를 만든다. 이러한 과정에서 퍼포먼스는 관람객들의 고정적인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에 개입하고 이를 해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