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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Jun 25. 2022

3_2# 분명 여행중이었다

Raymond Chang을 기억하며

호주에서는 고인이 돌아가신 지 2주 뒤 장례식을 치른다. 나는 스티븐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스티븐의 고양이 키아라를 봐주기로 했다. 스티븐의 집은 엉망이 된 지 오래였고, 갑자기 주인을 잃은 어린 고양이는 사람이 들고 날 때마다 그릉그릉 울어댔다. 그렇게 슬픔은 집안의 곳곳에 묻어났다. 나는 그 뒤로 길을 잃기 일쑤였고, 내리는 정류장을 지나치고, 다시 되돌아와 또다시 정류장을 지나치고, 결국 약속시간에 한 시간 이상 늦곤 했다. 하루아침에 누군가 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단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스티븐과 스티븐의 어머니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키아라가 눈에 어른거려 넋 빠진 채로 멜버른 시내를 걸었다. 


스티븐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들의 아버지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자리를 가지려고 해. 이민자로서, 아시안으로서의 우리들의 아버지에 대해 스테피, 아이비, 너와 함께 얘기하면 좋겠어." 

우리는 각자 먹을 걸 싸가지고 아이비의 집에서 서로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이비는 베트남식 식사를 준비하고, 나는 디저트와 음료수를, 스테피는 아이스크림을, 스티븐은 중국 전통 과자를 들고 모였다. 그리고 우리는 스티븐을 꼭 껴안아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친구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믿기지 않았다. 


스티븐이 챙겨 온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유품과 사진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부유한 중국계 이민자로서의 어린 시절, 호주 퀸즐랜드에 정착하면서 홈스테이 했던 청소년기, 대학교 시절 친구들과 파티하는 청년기, 그리고 부인을 만나고 스티븐을 낳아 가족이 된 사진들이었다. 무엇보다 말레이시아의 어느 저택 앞에 서 있는 흑백 사진 속의 사람들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귀품이 났다. 오래된 시대극에서 본 듯한 우아한 차림의 아름다운 인물들은 희고 큰 저택을 배경으로 저먼 쉐퍼드와 함께 약 백 년 전 그곳에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이 있었다. 장례식을 준비하다가 발견한 아버지가 직접 남긴 기록이었다. 인생 타임라인이라고 해야 할까. 책의 맨 뒤 부분에 들어가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연표나 간략한 일대기 기록이 있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간략한 연표처럼 기록해두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기록이 발견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는지 그 기록은 마치 발견되길 바랐던 것처럼 눈에 뜨일만한 곳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아시아계 아버지답게 무뚝뚝한 어조로 소소하고도 중요한 삶의 면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스티븐이 태어났던 날, 어느 병원에서 몇 킬로로 태어났는지, 언제 첫 집을 얼마에 구입했는지, 첫 차의 가격과 모델명 그리고 그 차를 처분한 날짜와 가격대, 스티븐이 학교에서 상을 받은 날, 대학교에 입학한 날, 미국의 리만사태 이후에 주가가 어떻게 떨어졌는지, 또 새롭게 구입한 주택의 위치와 정확한 매매가, 꿈에 그리던 차를 구입했던 날과 되팔던 가격 등. 

자동차 매캐닉답게 차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구절구절마다 우리는 웃음이 터졌고, 아버지가 남긴 기록의 어딘가에서 아버지가 그때 느꼈을 감정을 찾아보느라 애를 먹었다. 그때 그 순간 아버지가 느꼈던 기분은 무엇이었을까? 기쁨이었을까 슬픔이었을까 안도감이었을까 걱정이었을까. 세세하고 꼼꼼하게 기록된 자동차의 모델명과 가격에서 아버지의 삶을 읽어내고 싶었다. 

그중에서 스티븐은 아버지가 애써 기록하지 않은 그 인생의 한 챕터를 찾아냈다. 

"2008년 경제위기가 왔고. 주식은.... 폭락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이 시기 2년 동안 지속된 실업 상태를 기록하지 않았다. 외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짧게 기록했다. 스티븐의 가족은 아버지의 실업으로 이 시기 꽤 힘들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절망감, 좌절감,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하교길에 아이를 부둥켜 안고 양볼에 뽀뽀세례를 하며 반겨주는 백인 부모들을 보고 스티븐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다른 친구들은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빠가 꽉 껴안아주고 뽀뽀해주면서 사랑해라고 하는데, 우리집은 왜 안그래?" 

"우리는 아시아 사람이라서 그래. 아빠가 스티븐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아시아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 사랑은 어떻게 전달될까.

가부장적인 문화의 이탈리아인 부모를 둔 스테피, 베트남 망명자인 부모를 둔 아이비, 한국인 부모를 둔 나, 모두 스티븐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받았다. 다들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잘 느껴지지 않는 부모의 사랑 말이다. 이를테면 "밥 먹었니? 더 먹어라, 이것도 먹어봐" 그저 먹기를 권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랑표현 말이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요리를 좋아하셨다. 말없이 팬을 잡고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냈고, 집안에서 가족들에게 요리해주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스티븐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요리로 표현된다는 것을 늦게 알게 되었다. 스티븐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상장을 받고, 어른으로 독립했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대견해했는지 그 모든 것을 늦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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