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쎄 Jun 25. 2022

3_1# 분명 여행중이었다

Raymond Chang을 기억하며

간밤에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스티븐의 몸 상태가 걱정이 되어 필요한 먹거리를 준비해서 현관 앞에 두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허허벌판에 트램 기차길이 있었고, 아무도 없는 밤 12시경 기차가 들어왔다. 한여름에 내리는 찬 빗줄기에 잔뜩 젖은 채로 CBD로 돌아가는 밤, 안전하게 숙소까지 갈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스티븐을 걱정할게 아니라 본인 걱정부터하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시간 뒤 다행히 빗방울을 툭툭 털어내며 숙소에 안전히 들어왔다.


그날 밤. 스티븐의 아버지가 실종됐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던캐스터Doncaster에 사시는 분이 그 새벽 밤길을 떠돌다가 사고를 당하셨고, 멜버른 시내의 어느 대형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다. 신원을 알 수 없는 50대로 추정되는 아시아계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해있었다. 뇌압을 측정해 본 결과 이 남성의 나이는 80을 훌쩍 뛰어넘겼다. 뇌사상태로 판단한 병원측은 가족을 찾기 전에 수술을 진행했다.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고 가족이 병원에 당도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일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셨다. 

한 달 전, 홍콩계와 싱가폴계 중국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스티븐은 나를 음력 설 가족식사에 초대했다. 나는 스티븐이 부탁한 에그롤과 외국인들이 좋아한다는 한국의 배음료를 사서 던캐스트로 향했다. 중국계 이민자들이 터를 잡고 있는 던캐스터는 멜버른의 CBD에서 차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이다. 스티븐과 나, 스티븐의 부모님과 고모님 이렇게 다섯이서 우리는 테이블을 셋팅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베지테리언인 나를 배려해 준비해 주신 설날의 식탁은 너무 따스했다. 그리고 전통 차와 에그롤을 먹으면서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안의 가장 어른이신 홍콩에 계신 100세를 넘기신 할머니께도 영상통화로 안부를 전했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다소 말귀가 어두운 것 같았지만 자상하셨고 여느 한국의 부모님처럼 더 많이 먹으라며 음식을 권하셨다. 내가 먹지 않는 새우를 연신 권하셔서 모두가 나서서 말렸지만, 깜빡 잊으시고는 다시 새우를 권하셔서 나는 감사히 받아 먹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통통한 새우가 그 식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재료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식사를 준비하고 뒷정리하기를 도맡아하셨고 우리의 대화에는 끼기 어려워하셨지만 정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Happy Luna New Year, Mona" 이라고 쓰인 붉은색에 금박처리가 된 복주머니를 나눠주시며 한 해를 무사히 보내도록 기원해주셨다. 내가 언제 이런 환대를 받아보았던가. 멀리서 어렵게 온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은 환대의 기억이 마음에 저릿하게 남았다.


한 번의 만남, 그리고 안녕히.

스티븐의 메세지는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제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셨고, 내일 오전에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기로 했어. 내일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할 거야."

아니, 이게 무슨 말이지? 믿을 수가 없다.

대체, 왜? 진짜야?  

정정하신 분이 하루 아침에 세상을 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수 밖에.

근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코로나 상황에 타국에서 가족도 아닌 친구가 병원에 면회를 갈 수도 없었고, 스티븐에게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묻고 늘어질 수도 없었고,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할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머리가 빙 돌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명석하지만 마음이 여린 스티븐이 이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전 08화 2# 절망 속에서 춤을 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