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벌써 2년차
님아 그 오이지를 담지 마오.
님에게 아무리 공무도하를 외쳐도, 님은 그예 오이지를 담으신다. 여기서 님은 바로 나다.
여름은 좋은 계절이다. 더위와 습기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채소 과일이 싸고 싱싱하다. 그 하나만으로도 여름은 추앙받을만하다. 오죽하면 이름도 열매를 뜻하는 여름이 아닌가.
싸고 싱싱한 채소가 지천으로 나오기 때문에 가격표를 들여다보며 들었다 놨다 심사숙고하지 않고도 채소와 과일을 살 수 있는 축복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이의 유혹은 견디기 어렵다. 겨울에는 한 개 2000원까지 가던 오이가 지금은 500원 정도로 4분의 1 가격으로 떨어졌다. 반의 반토막이 난 주식 투자의 아픔을 오이 투자로 만회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솟구친다.
제철을 맞아 가격이 떨어진 오이를 야무지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오이지다. 혜자로운 오이 가격을 눈앞에 두고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담느냐 마느냐. 담느냐 마느냐의 싸움에서는 간단하게 담는다가 승리한다.
관문은 이제 몇 개를 담느냐로 넘어간다.
10개, 20개는 어쩐지 소꿉장난 같다. 무더위로 입맛이 없을 때 오이지무침과 오이지냉국을 만들어 먹으면 집 나갔던 입맛이 집 찾아 돌아온다. 덮어놓고 먹다 보면 한 달도 못 가 떨어질 게 분명하다.
게다가 마트에 가서 시판되고 있는 오이지 가격을 보면 직접 만드는 게 얼마나 이득인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다. 시판 오이지는 1개 약 1500원에서 2000원 정도의 가격표가 붙어있다. 500원짜리 오이를 사서 오이지를 만들면 앉은자리에서 1000원은 버는 셈이다. 설탕이나 소금, 식초 같은 부재료는 이미 있는 재료를 쓰니까 추가 비용은 없는 거라고 믿어버린다.
그럼 30개? 이왕 하는 거 50개 정도는 해야지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여기에 엄마도 조금 드리고 새언니도 맛보시라고 하려면 100개는 담아야 넉넉하지 않을까.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해지려는 오이지에 대한 욕망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는 건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작은 집에 살아서 다행이다.
오이지 담는 레시피는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대표적인 전통의 레시피는 끓는 소금물 붓기다. 오이 100개 기준으로 물 10리터에 굵은소금 3 대접을 넣고 팔팔 끓인 후 소금물이 뜨거울 때 오이에 붓는 방식이다. 다음날 오이에서 수분이 빠져나와 묽어진 물을 다시 꺼내 소금을 추가로 넣고 끓여 다시 붓는다. 이 상태로 5일 정도 실온에 두었다가 냉장고로 옮겨 보관하면 된다. 이 방법으로 하면 짭짤하면서도 오독오독한 전통 오이지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문제는 소금물을 두 번 끓여 부어야 해 조금 번거롭다는 것. 또 까딱하다가는 골마지(김치나 장아찌, 장류 등에 하얗게 생기는 물질)가 생길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요즘에는 전통 방식에서 탈출한 간편한 레시피들이 다양하게 나와있다. 지난해 만들어보고 간편해서 정착한 오이지 레시피가 있다. 이른바 ‘물 없이 담는 오이지‘다. 지퍼백만 있으면 누구나 눈감고도 만들 수 있다.
오이가 아홉 개쯤 들어가는 큼직한 지퍼백에 오이를 넣고 소금, 설탕, 식초, 소주를 부은 다음 지퍼를 닫고 납작하게 눕혀 놓는다. 오이 10개에 소금 반컵, 설탕 1컵, 식초 1컵, 소주 반컵을 넣으면 된다.
이틀 정도 지나면 오이에서 수분이 빠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오이 색깔이 조금씩 변한다. 하루 한 번씩 지퍼백을 뒤집어 오이가 앞뒤로 골고루 절여지도록 한다. 자반 뒤집듯 지퍼백을 뒤집다 보면 일주일 후면 그럴듯한 오이지가 완성된다. 이후에는 지퍼백채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하나씩 꺼내 먹으면 된다. 물 없이 만든 오이지는 냉장고에 넣어두면 6개월 이상 거뜬하게 보관할 수 있다.
지퍼백째로 보관해두고 있다가 여름철 입맛 잃은 지인이 있다면 선물해 주는 재미도 있다. 직접 만든 저장식품을 선물한다는 자부심에 온몸에 '오이지 엔돌핀'이 솟아난다. 단, 원하는 사람에게만 선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장식품을 안겨주는 것은 '저장인'(물론 이런 단어는 없다)이 피해야 할 제1의 원칙이다. 냉장고에 저장식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다는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오이지로 만들어 먹는 대표적인 반찬은 오이지무침이다. 오이지를 납작납작 썰어 찬물에 담가 짠기를 뺀 다음 물기를 꼭 짜고 들기름, 깨소금, 설탕, 다진 마늘, 고춧가루, 다진파를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밥 한 공기 뚝딱 먹는 여름 밑반찬이 완성된다.
오이지를 절일 때 소금이 다량 들어가 짭짤하기 때문에 오이지를 무칠 때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찬물에 우려낼 때 간이 많이 빠져 싱겁다면 멸치액젓을 약간 넣어 간한다.
오이지를 썰어 그릇에 넣고 생수를 부은 다음 식초와 설탕으로 간하는 오이지냉국도 여름철 입맛 없을 때 훌륭한 반찬이다.
오이는 비교적 농사짓기 수월한 채소다. 심어놓은 뒤 지주대만 잘 만들어주면 쑥쑥 크면서 오이를 잘도 매단다. 그러나 아직 시골집 텃밭에 심어놓은 오이가 제대로 열매를 맺으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내 텃밭의 오이는 아직 꽃도 제대로 피지 않았지만 시장에는 싱싱하고 값싼 오이가 가득하다. 싱싱하고 맛있는 오이를 부지런히 생산해 값싸게 제공해 주고 계시는 진짜 농부님들에게 감사하며 오늘은 오이를 몇 개나 사 올까 궁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