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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움 Jun 18. 2023

7. 바로서기

상대의 결핍을 채워줄 때, 공허하거나 충만하거나

진오가 번호키를 눌러 여정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 안에서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들렸다.

“누나! 나 들어왔어!”

진오가 식탁 위에 장바구니를 올려놓고 포장용기를 꺼내는데 여정이 방 안에서 나왔다.

“그게 다 뭐야?”

“반찬가게 갔다 왔지! 이건 3개 만원, 이건 4개 만원!”

여정이 반찬을 살펴보다 의아한 듯 진오를 쳐다봤다.

“근데 왜 여기로 가지고 와?”

“아니, 오늘부터 별이 여기서 저녁 먹잖아. 미안하니까, 반찬 좀 준비했지.”

진오가 주춤거리며 여정의 눈치를 보자, 여정이 눈을 흘기며 진오를 올려다봤다.

“고추무침을 별이 먹을까? 낙지젓갈도 있네? 맵고 짜고?”

“아니, 뭐. 나도 가끔... 먹고, 누나도 먹고, 리암이, 진가도 먹고 그럼 좋잖아.”

“됐고! 이따 5시에 와서 반찬 만드는 거 배워. 별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먹여야 되는 게 뭔지. 식단 짜는 것부터 해.”

“예썰!”

“딱! 일주일 만이야. 그다음부턴 네 집에서 네가 직접 해 먹여. 네 자식이니까!”

“일주일? 너무 짧다. 요리하는 거 어렵단 말야.”

여정의 말에 진오가 아쉬운 듯 말하자, 여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진오를 쳐다봤다.

“그치? 혼자 별이 키우는 거 너무 어렵지? 별이… 엄마랑 만나게 하는 건 어때?”

여정이 휠체어를 뒤로 빼며 물었다. 고추를 하나 꺼내 먹으려던 진오가 손을 멈추고 여정을 노려봤다.

“뭔 소리야? 엄마라니. 애를 때린 여자야. 또 뭔 짓을 할 줄 알고 애를 만나게 해!”

진오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치자 여정이 뒤로 물러났다. 큰 소리에 놀란 리암이 이층에서 내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

리암이 다가와 엄마의 등을 감싸고 다정하게 물었다. 여정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리암을 보고 웃었다. 진오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리암이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내 진오에게 던져 주었다. 진오가 잽싸게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큰소리쳐서 미안해!”

진오의 말에 리암이 괜찮다는 듯 진오의 등을 토닥였다.

“누나, 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다정해? 누나는 아니고 외할아버지를 닮았나? 아저씨도 엄청 다정하시잖아. 아니면 매형?”

진오의 말에 여정이 리암의 표정을 살폈다. 매형이라는 말이 나오자 리암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빠는 아니고 외할아버지 닮았어. 엄마,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리암이 진오에게 담담하게 대꾸하더니 여정에게 미소 짓고 나갔다.  

“리암이는 지 아빠 닮았다는 얘기 엄청 싫어해! 너한테 엄마 닮았다고 하면 화내는 것처럼.”

여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오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만, 한 번쯤은 별이 엄마 얘기를 들어봐야 하잖아. 별을 위해서. 우리가 아는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어. 진실이 아니라면 별한테 거짓을 심어주고 있는 거고. 확인해 보라고. 피하지만 말고!”

여정이 답을 강요하듯 진오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진오가 불만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고 듣고 있다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이 심상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시연이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리암이 맞은편에 앉아 시연을 바라봤다.

“실례합니다.”

리암이 노크하듯 테이블 위를 두 번 두드렸다. 시연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자 리암의 눈과 마주쳤다.

“미안해요. 또 놀라게 했네요. 그래도 노크는 했어요. 지난번에도, 지금도.”

리암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노크하는 시늉을 하자 시연이 따라 웃었다.

“또 리암씨 앞에서 잤네요. 그래도 오늘은 소리 안 질렀어요. 언니는 뭐해요?”

“진오삼촌이랑 얘기 중이에요. 조금 심각해요. 별이 엄마 얘기하는 듯.”

시연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부모님 어디 계세요?”

리암의 질문에 시연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했죠?”

시연이 말없이 멍하니 있자 리암이 당황하여 물었다. 시연이 리암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질문이 조금 뜬금없긴 했어요. 엄마는 보름 전에 돌아가셨고, 아빠는 제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아... 미안해요. 몰랐어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리암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시연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한 달 동안 같이 있었어요. 병원에서. 제가 마흔 살까지 엄마랑 같이 살았거든요? 근데 그 한 달 동안이 가장 마음 편했어요. 엄마한테 받고 싶은 거 다 해드렸거든요.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발도 씻겨 주고. 같이 살 때는 엄마가 무섭고 답답하기만 했었는데 쓰러지신 뒤로는 화내기는커녕 말도 못 하고 몸도 꼼짝 못 하고 아기 같았어요...”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당황한 시연이 고개를 뒤로 젖혀 눈물을 찍어냈다. 리암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연의 눈 위에 놓아주었다.

“마음껏 울어요. 괜찮아질 때까지.”

그때 여정의 집에서 나온 진오가 심상으로 걸어왔다. 리암이 얼른 진오에게 다가가 앞길을 막았다.

“삼촌, 엄마는? 집으로 가는 거지?”

“아니, 나 시연쌤한테 할 말 있는데? 비켜봐. 심상 갈 거라니까?”

심상의 대문 앞에서 리암과 진오가 실랑이 하자 시연이 급히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리암, 괜찮아요. 하실 말씀이 뭐예요?”

시연이 마당에 서서 진오에게 물었다.

“아니, 과자를 먹었으면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쌤,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죠. 과자 부스러기 그렇게 놔두면 벌레 꼬여요.”

시연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진오를 쳐다봤다.

“아니, 저기 테이블 위에 과자봉지!”

진오가 답답한 듯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텀블러 옆에 쪽지모양 포장지가 눈에 띄었다.

“아! 이거요?”

시연이 과자봉지를 집어 진오에게 보여주자 진오가 더 답답한 듯 짜증을 냈다.

“내가 정리해서 그렇게 접어 놨고요. 아침에는 활짝 열려있던데.”

“제가 그랬다고요? 저 아닌데요.”

시연이 멀뚱히 진오를 쳐다봤다. 리암이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심상 주변을 훑어 CCTV를 찾았다.

“저거 확인할 수 있어요?”

리암이 현관 위에 달린 CCTV를 가리켰다.

“어! 잠깐만! 쌤, 잠깐만요!”

진오가 핸드폰을 꺼내 앱을 열더니 심상으로 들어와 앉았다.

“내가 아침에 10시쯤 나왔으니까, 9시, 8시, 7시, 6시... 여기 있다!”

“뭐가요?”

시연이 진오의 핸드폰을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리암이 핸드폰을 낚아채 시연에게 넘겨주었다. 진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암을 쳐다보다가 시연에게 소리쳤다.

“거기 여학생 보이죠? 교복!”   


CCTV 영상에 교복 재킷과 체육복 바지를 입은 마르고 작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구부정하게 심상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여학생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베개 삼아 엎드려 잤다. 한참 후에 일어나 가방에서 과자봉지를 꺼냈다. 배가 고팠는지 과자를 한 움큼씩 입에 넣었다. 간혹 기침을 하거나 가슴을 치는 모습도 보였다.

“목마른가 보네.”

진오가 카페에 앉아 영상을 보며 말했다. 마침 여정이 탄산수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진오가 목이 타는 듯 탄산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는 애야?”

“아니, 근데 이거 우리 교복 같지 않아? 청양중!”

진오가 화면의 교복을 가리키자 여정이 유심히 쳐다봤다.

“돋보기 없어서 잘 안 보여. 근데 경찰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 새벽 두 시에 와서 밤새 있었다며.”

돋보기라는 말에 진오가 불쌍한 듯 여정을 바라보자, 여정이 진오를 무섭게 째려봤다.

“뭘로 신고해? 무단침입? 쓰레기 투척?”

“아니, 여자 애가 혼자 새벽에 돌아다니면 위험하잖아. 부모도 걱정할 거고.”

여정의 말에 진오가 이해 안 간다는 듯 눈을 꿈뻑였다.

“별이 중학생이 돼서 밤새도록 집에 안 들어와. 어떨 거 같아? 너는 뭐, 쿨쿨 잘 자겠다만.”

여정이 숨을 들이쉬고 차분히 설명해 주자 진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안되지! 그게 무슨 일이야! 가출인가? 안돼, 안돼! 우리 별이 클나!”

진오가 잔뜩 겁먹은 얼굴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여정이 빈 컵을 무릎 위 쟁반 위에 올리고 휠체어를 뒤로 뺐다.

“그래서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어? 별이 엄마 만나는 거.”

여정이 진오와 거리를 두고 물었다. 진오가 별이 엄마라는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엄마랑 단절하는 거 너 하나로 끝내. 별한테 강요하지 말고.”

“무슨 강요를 해. 내가 뭐 어쨌다고...”

진오가 욱하여 큰소리로 소리치다 이내 화를 참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직 어린아이잖아. 부모는 기회를 제공할 의무가 있어.”

“애가 놀라면? 무서워하거나... 트라우마가 돼서 공포스러울 수 있잖아?”  

“시연이랑 내가 볼 땐, 별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거 같아. 그리고...”

여정은 조심스럽게 별의 엄마, 하영의 이야기를 전했다. 다행히 진오는 여정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었다. 간혹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하영이 심상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있던 풍이 꼬리를 흔들며 하영에게 다가갔다. 하영이 미소 지으며 쪼그리고 앉아 풍을 쓰다듬었다.

“너구나, 풍. 나는 별이 엄마야. 고마워, 별이 사랑해 줘서.”

풍이 하영의 냄새를 맡다가 얼굴을 들더니 하영의 얼굴을 핥았다. 하영이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풍은 더 적극적으로 하영에게 올라탔다.

“풍! 뭐 하는 거야! 내려와, 내려와!”

심상에서 나오던 진오가 깜짝 놀라 풍을 제지했다. 하영이 머리가 헝클어진 채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죄송해요! 우리 풍이가 이런 애가 아닌데...”

진오가 풍의 목줄을 잡고 서서 하영을 쳐다봤다. 시연이 심상에서 나오다 하영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가 일으켰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제가 그냥 넘어진 거예요.”

“그쵸? 우리 풍이가 공격하고 그런 애는 아니에요.”

시연이 멀찍이 서 있는 진오를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영씨, 들어가요. 좀 이따 별이 올 거예요.”

“별이요? 누구신데…”

시연의 말에 진오가 눈을 치켜뜨고 묻자, 하영이 자리를 피해 심상 안으로 들어갔다. 시연이 얼떨떨하게 굳어 있는 진오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별이 엄마예요.”

진오가 멍하니 시연과 심상 안의 하영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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