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움 Jun 18. 2023

6. 잔상

알게 되면 여유가 생긴다.

기울어진 태양이 붉게 빛났다. 별과 풍이 신 난 듯 뒷마당을 뛰어다녔다. 리암과 진가가 화로에 장작을 쌓고 고기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별, 그만 뛰어! 정신없어.”

진오가 집안에서 아이스박스를 들고 나오며 소리쳤다. 별이 긴장한 듯 멈춰 섰다. 풍이 별의 얼굴에 코를 갖다 댔지만 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진오는 아이스박스에서 고기를 꺼내느라 별을 보지 못했다. 여정이 휠체어를 움직여 별에게 다가갔다.  

“별아, 아빠 화낸 거 아냐, 불 피우면 위험하니까. 앉아서 놀자. 고기 금방 구워줄게.”

여정이 별의 등을 쓰다듬자 별이 여정의 품에 파고들었다. 리암이 그 모습을 보고 진오를 툭 쳤다. 진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암을 쳐다봤다. 리암이 턱으로 별을 가리키자 진오가 돌아봤다. 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여정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제야 알아챈 진오가 쩔쩔매며 별에게 다가갔다.

“우리 공주님~ 왜? 왜 그래?”

“헐, 왜 그러긴? 아빠가 소리 질러서 그러지. 그치, 별아?”

진가가 고기를 살피다 한 마디 했다.

“미안, 미안! 아빠가 소리 질렀구나. 아빠가 잘못했네. 아빠 떼찌!”

진오가 휠체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하자, 여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빠, 때찌!”

진가가 달려와 진오의 등에 올라타자 진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진오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진가를 노려보는데 별이 큰소리로 웃었다. 별이 여정의 품에서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거렸다. 진오도 찌푸린 얼굴을 펴고 별을 따라 웃었다. 진가가 일어나 진오에게 으쓱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진오가 진가의 손을 잡고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엄마, 고기 구울 건데 시연씨한테 전화해 볼래요?”

불을 조절하던 리암이 여정에게 물었다. 여정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다시 한번 더 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여정이 시연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진가가 이층 테라스를 향해 시연을 크게 불렀지만 잠잠했다.

“자나? 집에 있긴 할 텐데. 진가, 갔다 올래?”

진가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려는데 리암이 불러 세웠다.

“내가 가볼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그래, 리암이 가보는 게 좋겠다.”

여정이 동의하자 리암이 장갑을 벗고 진가에게 불을 보라고 손짓했다. 빨갛게 불태우던 태양은 빠르게 사라지고 핑크빛이 흔적을 남겼다. 이층 계단 끝에 난 창으로 핑크빛이 쏟아졌다. 리암은 몇 계단씩 단숨에 올랐다.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긴장한 리암이 약하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거실 바닥에 캐리어가 열려 있고 옷과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리암은 주위를 둘러보다 장우산을 발견하고 손에 들었다. 신발을 벗고 천천히 들어가는데 새소리가 들렸다. 캐리어 안의 핸드폰 소리였다. 방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리암은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너저분한 거실과 달리 단정한 방 안은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거실에서 사람 숨소리가 들렸다.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테라스 앞에 침낭이 눈에 들어왔다. 리암이 조심스레 다가가자 열린 지퍼 사이로 시연의 얼굴이 보였다. 리암은 긴장이 풀린 듯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곤히 잠든 시연을 깨워야 하나 고민하는데, 잠결에 눈을 뜬 시연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시연의 비명소리는 진오네 뒷마당에도 크게 들렸다. 풍이 이층을 올려다보며 짖었고 별이 귀를 막았다. 여정과 진가가 마주 보았다. 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고기를 굽는데 집중했다.

“이모 놀란 거 같은데? 형보고 놀란 건가? 살금살금 들어갔나?”

진가가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몰래 들어가는 시늉을 했다. 여정이 귀를 막고 있는 별의 얼굴을 감싸주며 고기를 뒤집는 진오를 흘겨보았다.

“너는 저 소리가 안 들려? 별이 놀란 건 보이지도 않지?”

“어? 별이 왜?”

진오가 마법에서 깨어난 듯 담담한 얼굴로 별과 여정을 번갈아 보았다. 여정이 답답한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저기 온다! 이모!”

진가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시연이 멋쩍게 웃었다.

“미안! 깜빡 잠들었지 뭐야. 잠깐 누워있는다는 게...”

“아유, 요새 피곤했잖아. 잘했어! 배고프지? 앉아, 앉아.”

여정이 시연을 끌어 옆자리에 앉혔다. 빤히 보고 있던 별이 자신의 작은 캠핑 의자를 끌고 와 시연과 여정 사이에 놓았다. 시연과 여정이 별을 보고 웃으며 의자를 펼쳐주었다. 진오가 열심히 고기를 건져 접시에 놓았다. 리암이 접시를 여정의 앞에 놓아주자, 여정이 고기를 잘게 잘라 별의 접시에 놓았다.

“별이 많이 먹어!”

“별이는 고기 별로 안 좋아해.”

여정의 말에 진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이 포크로 고기를 집어 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진오가 그런 별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여정이 고개를 흔들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이 고기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애가 고기를 이렇게 잘 먹는데... 맨날 치즈피자 먹인 거야?”

“아니, 맨날 치즈피자만 얘기하니까. 밥 주면 다 남기고.”

진오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애한테 편의점 도시락 준 거 아니지? 설마... 배달이라도 했겠지. 반찬가게도 많으니까... 아니지?”

“편의점 도시락이 어때서? 밥도 있고 반찬도 있고 고기도 있는데!”

여정이 어이없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다섯 살 애한테 영양이 얼마나 중요한데! 바로 조리한 거랑 공장 거쳐서 나온 거랑 같냐? 너한테 좋다고 애한테도 좋은 거 아냐. 애한테 필요한 걸 찾아서 줘야지. 쉽게 아빠 될 생각 하지 말고 공부 좀 해. 물어보든지!”

여정이 정색하자 시연과 리암이 젓가락질을 멈췄다. 진가는 고기를 씹으며 여정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오가 혼나는 아이 마냥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별이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고기를 맛있게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잘못했네. 고기 좀 구워줄걸.”

“앞으로 별이는 우리 집에서 저녁 먹여.”

“나는?”

진오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기대에 차서 여정을 쳐다봤다.

“너는 집안일 좀 배우고.”

“아니, 아니. 나도 저녁밥 줘!”

여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시연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시연이 웃으며 여정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기 식으면 맛이 없는데 일단 먹을까요?”

시연이 고기를 집어 여정의 입에 넣어주었다. 여정이 웃으며 받아먹자 리암도 고기를 집어 진오 입에 넣어주었다. 진오는 여전히 애타는 표정으로 여정을 쳐다보며 고기를 씹었다.


핑크빛 하늘은 사라지고 은근하게 빛나는 둥근달이 떴다. 시연과 여정이 심상의 마당에 핀 장미를 들여다보았다.

“어쩜, 신경 써 주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활짝 폈네! 혼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을까?”

여정이 꽃향기를 맡다가 감탄하듯 말하며 시연의 등을 쓰다듬었다. 여정의 옆에 주저앉아 시든 잎사귀를 떼어내던 시연이 여정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살면서 한 번쯤은 이렇게 꽃 피워야 할 텐데... 나는 늘 봉오리인 거 같아. 노력이 부족한 거겠지?”

“전에 그런 꽃들을 본 적이 있어. 겨울이었는데 너무 따뜻했던 거야. 꽃봉오리들이 맺혔더라고, 계속 따뜻하니까 꽃들도 ‘이제 봄인가!’ 했겠지?”

시연이 의자에 앉아 여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웬걸! 며칠 지나니까 너무 추운 거야. 눈도 오고... 나중에 보니까 꽃봉오리들이 그대로 얼어버렸더라. 자라고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만, 노력이 곧 개화는 아닌 거 같아.”

“그치. 환경이 중요하지. 나는 영영 꽃을 못 피우고 갈 것 같아. 얼어붙은 꽃봉오리처럼.”

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시연이는 들어오는 운만 막지 않으면 돼. 그동안 노력도 많이 했고 사람들한테 즐거움도 도움도 많이 줬잖아. 이제부턴 좋은 사람들, 좋은 공간, 좋은 것들이 밀려올 거야. 피하지만 말자!”

여정이 다짐을 받듯 시연의 손을 꼬옥 잡았다. 따뜻했다.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정을 마주 봤다. 여정과 시연이 달에게 기도하듯 동시에 달을 올려다봤다.

“근데 언니, 별이 엄마 말이야.”

시연이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아까 여기 왔었어.”

“여기? 별이 엄마인 거 어떻게 알았어? 나도 얼굴은 모르는데?”

“와서 얘기하더라고. 별이 엄마라고.”

“그래서, 뭐래? 애를 왜 때렸대?”

여정이 눈을 크게 뜨고 궁금한 듯 눈을 꿈뻑였다.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때렸다고?”

“얘기가 좀 긴데, 결론은 때린 적은 없고 소리 지르고 방치한 적은 있다. 근데 그때 엄마한테 맞은 건 하영씨더라고.”

“하영?”

“별이 엄마.”

여정이 고개를 끄덕이다 의아한 듯 시연을 쳐다봤다.

“그 나이에 엄마한테 맞아? 애도 낳았는데?”

“하영씨 부모님이 오래전에 이혼하셔서 하영씨는 네 살부터 친할머니랑 살았대. 고등학교 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하영씨를 돌봐주지 않아서 그냥 혼자 살았대.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하영씨가 별이를 낳고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찾아왔나봐. 같이 살자고.”

“뭐 그런 부모가 다 있냐...”

여정이 한숨을 몰아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영씨는 좋았대. 엄마가 별이도 봐주고 자신도 챙겨주니까. 하영씨는 직장에 나가고 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딱 1년 동안은 행복했대.”

“그 다음엔?”

여정이 긴장한 듯 시연의 답을 기다렸다.

“엄마가 술 마시는 일이 많아지더니 돈 내놓으라고 들들 볶았나봐. 알고 보니까 맨날 술 마시고 도박해서 아빠한테 이혼 당했던 거고.”

“아휴, 그 아빠는 일찌감치 좀 알려주지!”

“그 아빠는 일찌감치 재혼하셔서 알콩달콩 잘 사신대. 아무튼 그 엄마가 몇 달 동안 하영씨를 때리고 집안 살림 부수고 별이는 놀래서 울고 하영씨는 우울증에 무기력해져서 직장도 안 나가고 별이는 방치되고. 그러다 이웃이 신고한 거야. 다행이다 싶었대.”

“에휴, 별이 엄마도 참 안됐다. 엄마 정이 얼마나 그리웠겠어. 별이 만나고 싶대?”

시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진가가 달려와 여정의 등을 안으며 매달렸다.

“엄마! 나 칭찬해줘! 설거지 다했어.”

“아이구, 잘했네! 다 컸네, 장하다! 진가, 최고!”

여정이 진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연에게 찡긋했다.


다음 날 아침, 진오가 여정의 집 앞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꽉 차서 터질 것 같은 장바구니가 무거운지 발등 위에 올려놓았다.   

“나 약속은 안했는데, 지금 들어가면 안 돼? ... 오케이!”

전화를 끊은 진오가 심상의 마당으로 들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테이블 위에 과자봉지와 부스러기가 널려 있었다.

“시연쌤 그렇게 안 봤는데... 지저분하네! 과자를 먹었으면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말야. 별이도 이렇게는 안 하는데... 쯧쯧쯧”

진오가 부스러기를 한데 모아 과자봉지에 넣고는 반듯하게 접어 쪽지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곤 한 쪽 다리를 떨며 핸드폰의 시계를 노려봤다.

“아싸, 10분! 들어가도 되겠지!”

진오가 벌떡 일어나 장바구니를 들고 여정의 집으로 뛰어갔다. 시연이 커피 한 잔을 들고 이층집에서 내려와 장미를 살폈다. 의자에 앉으려는데 테이블 위에 쪽지를 발견하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과자봉지 같은데... 누가 먹었지? 별인가?”

시연이 주변을 살피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눈을 감았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시연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향기를 맡았다.

“행복하다... 엄마도 거기서 행복하지? 자유롭고...”

이전 05화 5. 공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